이효석문학상

최종심 진출작 ⑥ 최진영'유진'

메밀꽃 필 무렵 2020. 8. 6. 13:06

밀폐된 기억을 열자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생일날 들은 동명 언니의 부음

시차 두고 연결된 두 `유진의 삶`

젊은 세대 무력감 섬세히 그려

독특한 각주 구성 실험도 눈길

 

김유태 기자

입력 : 2020.08.05 16:56:39

 

 

21회 이효석 문학상 / 최종심 진출작 최진영 `유진`

타인이 ``의 실존에 필수적이라는 문장은 한 철학자의 것이다. 자아를 구성하는 질료가 타인이란 의미다. 그러나 삶이란 연속적이지 않고 의외로 단절적이어서, 한 시절이 흐르면 그 시절 동행했던 상대와의 기억을 잊는 순간이 오곤 한다. 최진영 `유진`은 바로 그런 사람과의 `밀폐된 기억`을 여는 이야기다.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그런 사람`을 향해 나지막한 음성으로 쓴 소설이다.

 

화자 ``는 이름이 같은 언니 유진을 잊고 살았다. 스무 살 무렵,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던 레스토랑의 매니저 언니였다. 마흔을 앞둔 생일날, ``는 언니 유진의 부음을 접한다. 같은 이름이란 이유로 비밀스러운 공감대를 가졌던 옛날의 그 언니. 그러나 이후 연락은 없었다. 지금까지 흘러온 인생의 절반쯤 살았던 시기에 친밀히 지냈던 동명이인의 부고 소식은 기억의 현을 건드려 삶을 울린다.

 

언니 유진은 삶을 정성스레 대했다. 반지하도 아닌 지하방에 살면서도 일요일마다 ``의 아르바이트 동기들을 집에 초대하길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생활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택한 가난이었다. 주어진 삶의 정면 앞에서 유진은 늘 당당했다. 작가를 꿈꾸고 대학 입학을 앞뒀음에도 무의미한 삶을 견디는 중이던 ``는 유진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정면을 얘기했다.

 

기억은 유진과 ``를 연결한다. "바람이 불어 가림막이 벗겨진 것처럼, 가림막 안에 놓여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바람에 휩쓸려 이리로 저리로 굴러다니는 것처럼, 따로따로 굴러다녀 그 전엔 보지 못한 부분이 더 눈에 띄는 것처럼, 유진 언니와 함께한 시절의 기억은 연속성 없이 개별적으로 세세하게 떠올랐다." `두 유진`의 가난은 시차를 두고 동일시된다. 약속 없이도 삶은 반복되는 걸까.

 

젊은 세대의 감정을 세필화로 박제한 듯한 진술은 최진영 작가의 담담한 문장을 곱씹게 하는 동인이다. ``가 우울감을 진술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우울감은 팔이 여럿인 시바 신처럼 쉬지 않고 나를 쓰다듬었다. 나는 매일 파괴되었으나 창조되었고 창조된 나는 파괴되기 전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무의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삶의 무의미성에 관한 고민은 영원한 숙제일 수도 있겠다.

 

단편 곳곳에 도입된 각주 구성은 독특하게 읽힌다. 소설에 달린 각주는 모두 32. 참고문헌이 아니라 소설 속 정황에 관한 `2차 진술`이 담겼다. 삶은 본론의 외길로 이뤄졌다고 착각하지만 무수한 각주가 모여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총론이지 않을까. 망각되어 가는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 , 각주 형식을 두고는 심사위원들의 호불호가 나뉘었다.

 

강영숙 소설가는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한 청춘의 이야기, 지난 생에서 `그런 언니` 한 명씩 스치며 만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 몇 장의 액자를 겹친 듯한 `짠한` 이야기"라고, 정여울 평론가는 "간신히 살아가도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을 그렸다, 계급적 우위와 편안한 삶을 등지고 사는 유진에게는 `진짜 삶`을 살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평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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