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상작
손보미 , 「끝없는 밤」
(대상 수상작을 제외한 후보작 5편에는 우수작품상 수여)
대상 수상자 약력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사랑의 꿈』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작은 동네』 『사라진 숲의 아이들』
중편소설 『우연의 신』,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 에세이집 『아무튼, 미드』등
한국일보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 수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진출한 작품(작가명 가나다 순)
작 가 | 작 품 | 출 처 |
문지혁 | [허리케인 나이트] |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
서장원 | [리틀 프라이드] |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
성해나 | [혼모노] |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
손보미 | [끝없는 밤] |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안윤 | [담담] |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
예소연 | [그 개와 혁명] | 웹진문장, 2024년 1월호 |
제24회 이효석문학상 운영위원
위원장: 방민호(재단 이사장, 평론가)
위 원: 김별아(재단 이사, 소설가)
위 원: 전지현(매일경제 문화부 부장)
위 원: 박동옥 (교보문고 IP사업단 단장 )
간 사: 김정은(교보문고 문학IP팀 에디터/차장)
간 사: 김유태(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간 사: 민가경(서울대 박사과정, 평론가)
심사위원
전성태(소설가)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소설 당선 등단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埋香)』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 『기타 등등의 문학』 등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2021~)
정이현(소설가)
2002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내 모든 것』
중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등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작가상 등 수상.
대상 수상작
손보미 , 「끝없는 밤」
(대상 수상작을 제외한 후보작 5편에는 우수작품상 수여)
대상 수상자 약력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사랑의 꿈』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작은 동네』 『사라진 숲의 아이들』
중편소설 『우연의 신』,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 에세이집 『아무튼, 미드』등
한국일보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 수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진출한 작품(작가명 가나다 순)
작 가 | 작 품 | 출 처 |
문지혁 | [허리케인 나이트] |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
서장원 | [리틀 프라이드] |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
성해나 | [혼모노] |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
손보미 | [끝없는 밤] |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안윤 | [담담] |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
예소연 | [그 개와 혁명] | 웹진문장, 2024년 1월호 |
제24회이효석문학상 운영위원
위원장: 방민호(재단 이사장, 평론가)
위 원: 김별아(재단 이사, 소설가)
위 원: 전지현(매일경제 문화부 부장)
위 원: 박동옥 (교보문고 IP사업단 단장 )
간 사: 김정은(교보문고 문학IP팀 에디터/차장)
간 사: 김유태(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간 사: 민가경(서울대박사과정, 평론가)
심사위원
전성태
소설가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에 소설 당선 등단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埋香)』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 『기타 등등의 문학』 등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2021~)
정이현
소설가
2002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내 모든 것』
중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등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작가상 등 수상.
편혜영
소설가
2000.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
소설집『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및 『어쩌면 스무 번>
장편『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및 『죽은자로 하여금』 등
이효석 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셜리잭슨상 등 수상
박인성
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비평 부문으로 등단
옮긴 책으로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
이지은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2015 경향신문 신춘문예 비평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소셜클럽》(문학동네, 2024)
현재 서울대학교 강사
수상소감
소설이 비로소 완성될 때
며칠 전, (이 수상작품집의) 편집자님이 보내준 「끝없는 밤」의 교정지를 검토하려고 오랜만―거의 1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 카페에 있었는데, 공기―소설 속 주인공이 키우다가 죽게 된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얼른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내 소설을 읽고 눈물짓다니, 맹세코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공기가 다니던 병원, 공기를 살리고 싶어서 ‘그녀’가 매달리던 어처구니없고 허황된 속임수들, 그리고 공기의 죽음,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 그 말.
올해 봄, 함께 살던 고양이 칸트를 떠나보냈다. 칸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고, 나와 함께 산 지는 10년이 되었다. 소설을 쓸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끝없는 밤」에는 몇 년 전 칸트가 신부전과 췌장염으로 병원에 다녔던 경험이 반영되었다. 병원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라고 했지만, 칸트는 그 모든 걸 이겨냈다. 나와 남편은 성가시더라도, “신부전과 췌장염을 이겨낸 고양이”라고 칸트를 부르는 걸 좋아했다. 그때, 칸트가 죽지 않고 살아났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칸트가 나중에 정말로 죽게 된다 해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깨달음 같은 건 부질없는 것이었다. 칸트가 암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 나는 큰 슬픔에 빠졌고, 칸트가 떠나버린 후에는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것이 싫었다.
싫었다. 이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내가 이제껏 읽은 소설들, 소설 속 인물이 느끼는 상실감과 괴로움들,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과정이야, 라고 나를 읊조리게 했던 순간들. 나는 소설을 통해 그런 것들을 배웠다고 여겼고, 소설을 통해 세계 도처에 숨죽이고 있는 상실감과 괴로움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내 소설을 통해 그런 것들을 전달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진실된’ 반응을 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칸트가 죽은 후, 나는 내가 얻은 깨달음이 허상(혹은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진짜’ 상실을 겪지 못한 내가 제멋대로 ‘겪었다고’ 믿은 것들. 내가 소설을 통해 배웠다고 믿었던 것들은 착각이었고, 내가 쓴 것들은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게 싫었다(그래도 써야 했다).
「끝없는 밤」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칸트를 떠나보낸 후 이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야. 공기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을 거야. 좀 더…… 잘 다뤘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제 ‘진짜’ 상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소설을 읽다가 나는 속절없이 슬퍼졌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끝없는 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내가 ‘진짜’ 상실을 겪었고, ‘진실된’ 상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낀 건 어불성설이리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물론 나는 상실을 겪었다. 그건 ‘진짜’ 상실이 맞고, 내가 느낀 슬픔도 ‘진실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이 공기를 상실한 것과는 전혀 다른, 개별적인 사건이었다. 나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었고, 소설 속 그녀의 상실은 그녀의 상실이었다. 세상의 모든 상상은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러므로 나의 상실을 통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내가 흘린 눈물은 칸트 때문이기도 한 것이지만, 동시에 공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 소설을 쓸 당시보다 지금 나는 공기의 죽음을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사건이 아니라, 정말로 마치 내게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착각이다. 내가 느낀 공기의 죽음은 칸트의 죽음을 경유한 것이므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분명히 공기의 죽음에 대해(혹은 이 세상의 다른 죽음들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을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건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고.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다. 소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소설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면 좋겠다고. 그건 (역시)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제껏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감각은 언제나 현실에서 실제로 (느끼게 될) 감정과는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그 반대는 가능한 게 아니겠느냐고. 이를테면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소설 속 세계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인간을, 그가 겪고 있는 슬픔과 상실과 좌절감을, 그가 하는 그 이상한 선택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를 통과한 후 비로소 보이는 소설 속 세계의 (숨어 있는) 조각들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어쩌면 현실이 소설을 반영하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뻔한 말이지만, 소설과 현실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이리라.
(당연히) 여전히, 어떤 소설들, 훌륭한 작가의 훌륭한 소설들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글’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그래, 라는 그런 느낌들. 훗날, 이 감정들이 착각과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그건 배신이 아니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하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현실과 소설 속 세계의 격차를 느끼는 순간, 하나의 소설(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 둘 다에게)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 세계를 비로소 마음 깊이 실감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설을 읽고 느끼게 될 착각과 오해, 그리고 (알게 될) 현실과의 격차, 그 격차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 소설 속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품은 채 다시 바라보게 될 현실……. 현실과 소설은 그런 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더 넓어지게 하고 깊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내 소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두렵고, 걱정이 된다. 정말로 그렇다. 그 어떤 것도 그런 두려움이나 걱정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끝없는 밤」을 다시 읽은 후로, 그리고 이 수상소감을 쓰면서, 글을 쓰는 것이 싫다던 나의 생각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 몇 달 동안 빠져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에서 낙관적인 기대로 몸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것 역시) 정말로 그렇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의 나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내 소설이 누군가에게 착각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기를.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착각을 통한 도약을 가능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때때로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나의 바람은 최대한의 욕심을 초과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어진다.
심사경위 및 심사평
고통의 실로 엮는 자기-바느질
우리가 소설에서 읽는 삶이란 누구의 것일까? 허구와 실제라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소설이 다루는 누군가의 삶에 대하여 소설의 독자들은 언제나 동일시와 거리감을 함께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소설이 변화해온 오랜 역사와 그에 따른 독법의 변화 속에서 형성된 감각이기도 하다. 오래전 이야기 문학 속의 인간이란 원래 정해진 운명을 살아가는 캐릭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근대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Self)의 개념이 강조되며,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 스스로를 발명하는 근대적 인간의 개념이 소설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기양양한 근대적 인간이란 사실상 오늘날 막다른 길에 처했으며,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것 혹은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이 더욱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 정체성(identity)이 그렇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인 화두만큼이나 문학의 중요한 화두이며, 노골적인 형태에서 점점 더 세련된 형태로 변화하며 오늘날 소설의 구성은 물론 그 독해에까지 변화를 요구했다. 젠더와 계급, 직업과 세대 등으로 전면화된 정체성은 소설 인물을 몇 가지 대표성으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구와 현실 사이의 명확한 경계 이상으로 소설을 읽는 일이 독자의 근본적인 현실과 교차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정체성 개념의 대두로 인해 근대문학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개념이 소설에서 희미해지거나 해체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우리는 자기라는 개념을 포기하기 어렵다. 허구적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삶에서도 우리는 선택과 그 결과, 연속적인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적극적 역할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2024년 이효석문학상은 우리 시대 문학에 연루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서 최근 한국소설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과정에 가까웠다. 자기와 정체성 사이에서 진자운동 하는 인간 존재가 소설의 허구적인 인물의 삶과 겹쳐질 때 발생하는 문학적 성찰들이 흥미로운 스펙트럼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성이란 하나의 대표적 시의성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여러 얼굴을 의미한다. 문학상 심사에서 포괄적이나마 한국소설의 지형을 살펴보는 일은 분명 하나의 일괄적인 기준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동시대성의 복합적 얼굴을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체 심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심사위원들은 2023년 6월부터 2024년 4월까지 기성 문예지 및 온라인 웹진에 발표된 소설 작품들을 두루 검토한 뒤, 각자의 추천작을 취합하여 1차 독해를 먼저 수행했다.
1차 독해에서는 총 16편의 후보작이 추천되었으며, 심사위원들은 각각의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두루 교환하였다. 형식적 완미함도 물론 주요한 평가 기준이었지만,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소설적 기세와 문학과 현실을 관통하는 강렬한 주제의식들이 심시위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추가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할 만한 작품들을 재추천하는 방식으로 다시 2차 독해를 수행하는 6편의 작품들을 선발하였다. 2차 독해 후보작으로는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 성해나의 「혼모노」, 손보미의 「끝없는 밤」, 안윤의 「담담」,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이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추천 및 선택을 받아 선정되었다. 이제 한 편씩 심사 과정에서 언급된 핵심들을 정리하면서 최종적인 수상작에 대한 심사평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우선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은 새로운 중산층 소설에 대한 경계의 재조정이라는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계급적 갈등은 기존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전형적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중산층이 태생적 상류층을 바라보는 미묘한 선망과 박탈감 쪽으로 좌표를 조정한다. 뉴욕의 화려한 자택에 살고 있는 피터의 집에서 초대받았으나, 허리케인이 불고 있는 어두운 밤의 풍경 속에 잠복한 심리적 위태로움이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이 계급적 긴장감 속에는 과거에 분명 피터의 롤렉스 시계를 훔쳤다는 기억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는 훔칠 수 없는 것에 박탈감이 있다. 동시에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자의 기대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소설적 분위기의 구축에 있어서도 좋은 평가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 박완서의 소설에서 보여진 중산층 소설로서의 한 줌의 도덕주의조차 불가능해진 오늘날의 중산층 의식이 오히려 중산층의 해체와 불가능성으로 읽힌다는 의견도 있었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오늘날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수행하는 소설로서의 충분한 매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저신장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지연장술’을 선택한 오스틴은 문제적이면서도 공감하기 어려운 거울-인물로서 소설 전체의 이끌어가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매개한다. 이러한 인물의 매개를 통해서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체성 인식의 곤경들과 인정욕구, 그리고 외부의 시선을 통해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손쉬운 자기 인식의 자화상을 겹쳐 보여준다. 오스틴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토미를 전우(戰友)라고 일컫지만, 동시에 자기에 대한 콤플렉스를 손쉬운 페미니스트 혐오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체성에 대한 성형 가능성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아이러니를 다루는 소설은 많지 않았다. 이 소설에는 이 시대의 젠더성과 차이(들)에 관해, ‘리틀’의 의미에 관해 뜨거운 질문을 촉박하는 흥미로운 문제작이라는 의견, 그리고 사회적 젠더와 생물학적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프라이드’를 고민한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충분한 공감을 얻었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이라는 소재적 신선함은 물론이고 마치 무당이 엑스터시(ecstasy) 상태에 빠져서 굿판을 벌이듯이 질주하는 소설적 기세를 동시에 달성한다. 주인공 문수는 ‘신빨’이 다한 오십대 박수무당으로 자신이 모시던 장수 할멈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가 새롭게 무당을 개업한 신애기에게로 옮겨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순간에 진짜에서 가짜가 되어버린 문수의 처지가 그를 새로운 강박으로 심화시켜간다. ‘진짜’라는 의미의 일본어 ‘혼모노(ほんもの)’와 ‘가짜’를 가리키는 ‘니세모노(にせもの)’를 반복적으로 환기하고, 진짜와 가짜 사이의 구별에 대한 강박적인 질문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의 기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진짜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자기초월적인 지점으로 끌고 간다. 근본적으로 진짜와 가짜의 대결이자 세대의 대결 속에서, 칼 위에 선 엑스터시 상태의 문수의 모습은 대결 자체를 극복해 버리는 자기증명의 순간을 보여준다. 동시에 세대 간의 문제를 새로운 소재로 소화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완결성 있는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과, 예술을 넘어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설득력을 높이 보는 심사위원 의견들이 있었다.
안윤의 「담담」 역시 오늘날의 정체성 서사가 처한 자기증명의 강박적 순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감당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은석과의 소개팅 자리에서 혜재는 자신이 바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것이 혜재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지를 묻는 은석의 물음은 정체성을 둘러싼 복합적 현실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구성해나가는 첫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들에게 있어서 온전히 극복될 수 없는 과거사의 내력과 그에 의해 구성된 정체성의 주름들은 하나의 통합적이며 균질한 방식의 정체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단한 대화처럼 보이며, 잘라낼 수 없는 과거와 정체성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 그리고 담담해질 수 없는 문제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를 크게 벌이지 않음에도 미묘하게 관계를 이끌어가는 게 돋보인 작품으로, 우리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부분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평이 있었다.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 역시 소설이 가진 매력과 설득력을 전달하면서도, 소설적 상황 구성에 의해서 다양한 평가를 이끌어낸 침착한 문제작이었다. 이 소설은 과거 운동권 세대의 현재로서 암 환자로 죽은 아빠 태수의 장례식장에 상주를 맡은 딸 수민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과거 세대의 투쟁과 실패한 혁명이 담담하게 환기되며, 노골적이기까지 한 과거 세대에 대한 장례식장의 풍경이 겹쳐진다. 오늘날 혁명의 전유와 그 재의미화하는 얼마든지 사적인 방식으로 맥락화될 수 있으나, 이 소설에서 사적으로 전유된 혁명과 특정 세대의 장례식장 풍경은 분명 도발적이면서도 품위를 갖추고 있는 소설적 구성을 선보였다. 태수가 생전에 입양했던 유기견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소설의 결말 장면이 그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거나,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의 애도 과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우리가 현재에 혁명을 재발견하며 재발명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기존 운동권 당사자들이 자기 삶에 대한 회한을 썼다면 이제는 조소도 아닌 애틋함으로 아버지 세대를 바라보는 정서가 느껴진다는 심사위원 의견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손보미의 「끝없는 밤」은 단연 압도적인 소설적 긴장감으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총체적인 삶에 대한 복습이자 불가능하며 불가피한 자기 발견의 심리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억을 웃도는 가격의 보트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아홉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인 ‘그녀’는 그들을 감싸고 있는 적당한 거리감과 불안한 대화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이키며 애써 모르는 척 잊고 살아왔던 자기 삶 내부의 통증을 예민하게 감각해나간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큰 파도와 거센 바람이 요트를 흔들면서, 과민할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통증에 대한 강박을 되살리는 ‘그녀’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구축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을 그대로 재현한다. 동시에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불가피하게 삶을 반추하며 발생하는 거센 격랑 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그러한 삶에 대한 진실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붙잡으며 감각하는 순간의 믿음이란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는 점이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보트처럼, 삶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란 어쩌면 다시 되찾을 수 없이 애도되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 역시 「끝없는 밤」은 한 사람의 내면을 통증으로 인식하고 관념화하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는 점, 그리고 끊어지고 침몰할 것 같은 진실을 현기증 나는 세계 안에서 끈기 있게 추적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2차 독해 과정에서 만장일치로 손보미의 「끝없는 밤」을 2024년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이 갖춘 형식적 완미함의 미덕뿐만 아니라 그 소설적 물음의 끈기가 삶의 고통을 온전히 복원하려는 고고학적인 소설가적 태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서두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소설들은 자기와 정체성에 대한 선명한 정답이 도출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한 자신만의 이해 방식을 관철해나가는 중이다. 손보미의 「끝없는 밤」은 이러한 자기 이해가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타협과 절충의 유혹마저 거부하며 소설이 감당해야 하는 자기이해의 비극적 고통을 되살려냈다. 고통이란 겁이 많고 예민한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증폭되며 우리의 감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러한 고통을 실로 삼아서 바느질처럼 자신을 엮어내는 「끝없는 밤」의 자기 서술의 직조물은 우리 시대 근대적 소설의 화풍이 도달한 표현주의의 극치처럼 보인다. 2024년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에게 깊은 찬사와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또한 이 수상작품집에 함께 수록된 우수상 작품들은 우리가 처한 좌표 없는 세계에서 자기와 정체성을 섬세하게 매만지며 저마다의 소설적 좌표를 그려나가는 작가들의 훌륭한 응답들이다. 이러한 응답을 함께 엮어 한 권의 수상작품집으로 다시 소개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모든 수상자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제25회 이효석문학상 심사위원단
전성태, 편혜영, 정이현, 박인성, 이지은
(심사위원 박인성 대표 집필)
시상식
장 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문학관
일 시: 2024년 9월 12일(목요일) 오전 11시
시 상: 대 상 - 상패와 상금 5,000만원, 우수작품상(5명) - 상장과 상금 500만 원
2000.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
소설집『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및 『어쩌면 스무 번>
장편『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및 『죽은자로 하여금』 등
이효석 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셜리잭슨상 등 수상
박인성(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비평 부문으로 등단
옮긴 책으로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조교수
이지은(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2015 경향신문 신춘문예 비평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소셜클럽》(문학동네, 2024)
현재 서울대학교 강사
수상소감
소설이 비로소 완성될 때
며칠 전, (이 수상작품집의) 편집자님이 보내준 「끝없는 밤」의 교정지를 검토하려고 오랜만―거의 1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읽었다. 카페에 있었는데, 공기―소설 속 주인공이 키우다가 죽게 된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얼른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내 소설을 읽고 눈물짓다니, 맹세코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공기가 다니던 병원, 공기를 살리고 싶어서 ‘그녀’가 매달리던 어처구니없고 허황된 속임수들, 그리고 공기의 죽음, 무지개다리를 건넌다는 그 말.
올해 봄, 함께 살던 고양이 칸트를 떠나보냈다. 칸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고, 나와 함께 산 지는 10년이 되었다. 소설을 쓸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끝없는 밤」에는 몇 년 전 칸트가 신부전과 췌장염으로 병원에 다녔던 경험이 반영되었다. 병원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라고 했지만, 칸트는 그 모든 걸 이겨냈다. 나와 남편은 성가시더라도, “신부전과 췌장염을 이겨낸 고양이”라고 칸트를 부르는 걸 좋아했다. 그때, 칸트가 죽지 않고 살아났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칸트가 나중에 정말로 죽게 된다 해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깨달음 같은 건 부질없는 것이었다. 칸트가 암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 나는 큰 슬픔에 빠졌고, 칸트가 떠나버린 후에는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것이 싫었다.
싫었다. 이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내가 이제껏 읽은 소설들, 소설 속 인물이 느끼는 상실감과 괴로움들,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과정이야, 라고 나를 읊조리게 했던 순간들. 나는 소설을 통해 그런 것들을 배웠다고 여겼고, 소설을 통해 세계 도처에 숨죽이고 있는 상실감과 괴로움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내 소설을 통해 그런 것들을 전달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진실된’ 반응을 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칸트가 죽은 후, 나는 내가 얻은 깨달음이 허상(혹은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진짜’ 상실을 겪지 못한 내가 제멋대로 ‘겪었다고’ 믿은 것들. 내가 소설을 통해 배웠다고 믿었던 것들은 착각이었고, 내가 쓴 것들은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게 싫었다(그래도 써야 했다).
「끝없는 밤」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칸트를 떠나보낸 후 이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야. 공기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을 거야. 좀 더…… 잘 다뤘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제 ‘진짜’ 상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소설을 읽다가 나는 속절없이 슬퍼졌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끝없는 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내가 ‘진짜’ 상실을 겪었고, ‘진실된’ 상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낀 건 어불성설이리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물론 나는 상실을 겪었다. 그건 ‘진짜’ 상실이 맞고, 내가 느낀 슬픔도 ‘진실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이 공기를 상실한 것과는 전혀 다른, 개별적인 사건이었다. 나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었고, 소설 속 그녀의 상실은 그녀의 상실이었다. 세상의 모든 상상은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러므로 나의 상실을 통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내가 흘린 눈물은 칸트 때문이기도 한 것이지만, 동시에 공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 소설을 쓸 당시보다 지금 나는 공기의 죽음을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사건이 아니라, 정말로 마치 내게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착각이다. 내가 느낀 공기의 죽음은 칸트의 죽음을 경유한 것이므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분명히 공기의 죽음에 대해(혹은 이 세상의 다른 죽음들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을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건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고.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다. 소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소설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면 좋겠다고. 그건 (역시)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제껏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감각은 언제나 현실에서 실제로 (느끼게 될) 감정과는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그 반대는 가능한 게 아니겠느냐고. 이를테면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소설 속 세계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인간을, 그가 겪고 있는 슬픔과 상실과 좌절감을, 그가 하는 그 이상한 선택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를 통과한 후 비로소 보이는 소설 속 세계의 (숨어 있는) 조각들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어쩌면 현실이 소설을 반영하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뻔한 말이지만, 소설과 현실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이리라.
(당연히) 여전히, 어떤 소설들, 훌륭한 작가의 훌륭한 소설들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글’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그래, 라는 그런 느낌들. 훗날, 이 감정들이 착각과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그건 배신이 아니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하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현실과 소설 속 세계의 격차를 느끼는 순간, 하나의 소설(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 둘 다에게)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 세계를 비로소 마음 깊이 실감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설을 읽고 느끼게 될 착각과 오해, 그리고 (알게 될) 현실과의 격차, 그 격차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 소설 속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품은 채 다시 바라보게 될 현실……. 현실과 소설은 그런 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더 넓어지게 하고 깊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내 소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두렵고, 걱정이 된다. 정말로 그렇다. 그 어떤 것도 그런 두려움이나 걱정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끝없는 밤」을 다시 읽은 후로, 그리고 이 수상소감을 쓰면서, 글을 쓰는 것이 싫다던 나의 생각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 몇 달 동안 빠져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에서 낙관적인 기대로 몸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것 역시) 정말로 그렇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의 나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내 소설이 누군가에게 착각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기를.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착각을 통한 도약을 가능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때때로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나의 바람은 최대한의 욕심을 초과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어진다.
심사경위 및 심사평
고통의 실로 엮는 자기-바느질
우리가 소설에서 읽는 삶이란 누구의 것일까? 허구와 실제라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소설이 다루는 누군가의 삶에 대하여 소설의 독자들은 언제나 동일시와 거리감을 함께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소설이 변화해온 오랜 역사와 그에 따른 독법의 변화 속에서 형성된 감각이기도 하다. 오래전 이야기 문학 속의 인간이란 원래 정해진 운명을 살아가는 캐릭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근대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Self)의 개념이 강조되며,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 스스로를 발명하는 근대적 인간의 개념이 소설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기양양한 근대적 인간이란 사실상 오늘날 막다른 길에 처했으며,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것 혹은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이 더욱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 정체성(identity)이 그렇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인 화두만큼이나 문학의 중요한 화두이며, 노골적인 형태에서 점점 더 세련된 형태로 변화하며 오늘날 소설의 구성은 물론 그 독해에까지 변화를 요구했다. 젠더와 계급, 직업과 세대 등으로 전면화된 정체성은 소설 인물을 몇 가지 대표성으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구와 현실 사이의 명확한 경계 이상으로 소설을 읽는 일이 독자의 근본적인 현실과 교차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정체성 개념의 대두로 인해 근대문학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개념이 소설에서 희미해지거나 해체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우리는 자기라는 개념을 포기하기 어렵다. 허구적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삶에서도 우리는 선택과 그 결과, 연속적인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적극적 역할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2024년 이효석문학상은 우리 시대 문학에 연루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서 최근 한국소설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과정에 가까웠다. 자기와 정체성 사이에서 진자운동 하는 인간 존재가 소설의 허구적인 인물의 삶과 겹쳐질 때 발생하는 문학적 성찰들이 흥미로운 스펙트럼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성이란 하나의 대표적 시의성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여러 얼굴을 의미한다. 문학상 심사에서 포괄적이나마 한국소설의 지형을 살펴보는 일은 분명 하나의 일괄적인 기준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동시대성의 복합적 얼굴을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체 심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심사위원들은 2023년 6월부터 2024년 4월까지 기성 문예지 및 온라인 웹진에 발표된 소설 작품들을 두루 검토한 뒤, 각자의 추천작을 취합하여 1차 독해를 먼저 수행했다.
1차 독해에서는 총 16편의 후보작이 추천되었으며, 심사위원들은 각각의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두루 교환하였다. 형식적 완미함도 물론 주요한 평가 기준이었지만,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소설적 기세와 문학과 현실을 관통하는 강렬한 주제의식들이 심시위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추가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할 만한 작품들을 재추천하는 방식으로 다시 2차 독해를 수행하는 6편의 작품들을 선발하였다. 2차 독해 후보작으로는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 성해나의 「혼모노」, 손보미의 「끝없는 밤」, 안윤의 「담담」,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이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추천 및 선택을 받아 선정되었다. 이제 한 편씩 심사 과정에서 언급된 핵심들을 정리하면서 최종적인 수상작에 대한 심사평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우선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은 새로운 중산층 소설에 대한 경계의 재조정이라는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계급적 갈등은 기존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전형적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중산층이 태생적 상류층을 바라보는 미묘한 선망과 박탈감 쪽으로 좌표를 조정한다. 뉴욕의 화려한 자택에 살고 있는 피터의 집에서 초대받았으나, 허리케인이 불고 있는 어두운 밤의 풍경 속에 잠복한 심리적 위태로움이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이 계급적 긴장감 속에는 과거에 분명 피터의 롤렉스 시계를 훔쳤다는 기억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는 훔칠 수 없는 것에 박탈감이 있다. 동시에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자의 기대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소설적 분위기의 구축에 있어서도 좋은 평가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 박완서의 소설에서 보여진 중산층 소설로서의 한 줌의 도덕주의조차 불가능해진 오늘날의 중산층 의식이 오히려 중산층의 해체와 불가능성으로 읽힌다는 의견도 있었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오늘날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수행하는 소설로서의 충분한 매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저신장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지연장술’을 선택한 오스틴은 문제적이면서도 공감하기 어려운 거울-인물로서 소설 전체의 이끌어가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매개한다. 이러한 인물의 매개를 통해서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체성 인식의 곤경들과 인정욕구, 그리고 외부의 시선을 통해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손쉬운 자기 인식의 자화상을 겹쳐 보여준다. 오스틴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토미를 전우(戰友)라고 일컫지만, 동시에 자기에 대한 콤플렉스를 손쉬운 페미니스트 혐오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체성에 대한 성형 가능성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아이러니를 다루는 소설은 많지 않았다. 이 소설에는 이 시대의 젠더성과 차이(들)에 관해, ‘리틀’의 의미에 관해 뜨거운 질문을 촉박하는 흥미로운 문제작이라는 의견, 그리고 사회적 젠더와 생물학적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프라이드’를 고민한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충분한 공감을 얻었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이라는 소재적 신선함은 물론이고 마치 무당이 엑스터시(ecstasy) 상태에 빠져서 굿판을 벌이듯이 질주하는 소설적 기세를 동시에 달성한다. 주인공 문수는 ‘신빨’이 다한 오십대 박수무당으로 자신이 모시던 장수 할멈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가 새롭게 무당을 개업한 신애기에게로 옮겨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순간에 진짜에서 가짜가 되어버린 문수의 처지가 그를 새로운 강박으로 심화시켜간다. ‘진짜’라는 의미의 일본어 ‘혼모노(ほんもの)’와 ‘가짜’를 가리키는 ‘니세모노(にせもの)’를 반복적으로 환기하고, 진짜와 가짜 사이의 구별에 대한 강박적인 질문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의 기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진짜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자기초월적인 지점으로 끌고 간다. 근본적으로 진짜와 가짜의 대결이자 세대의 대결 속에서, 칼 위에 선 엑스터시 상태의 문수의 모습은 대결 자체를 극복해 버리는 자기증명의 순간을 보여준다. 동시에 세대 간의 문제를 새로운 소재로 소화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완결성 있는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과, 예술을 넘어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설득력을 높이 보는 심사위원 의견들이 있었다.
안윤의 「담담」 역시 오늘날의 정체성 서사가 처한 자기증명의 강박적 순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감당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은석과의 소개팅 자리에서 혜재는 자신이 바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것이 혜재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지를 묻는 은석의 물음은 정체성을 둘러싼 복합적 현실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구성해나가는 첫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들에게 있어서 온전히 극복될 수 없는 과거사의 내력과 그에 의해 구성된 정체성의 주름들은 하나의 통합적이며 균질한 방식의 정체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단한 대화처럼 보이며, 잘라낼 수 없는 과거와 정체성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 그리고 담담해질 수 없는 문제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를 크게 벌이지 않음에도 미묘하게 관계를 이끌어가는 게 돋보인 작품으로, 우리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부분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평이 있었다.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 역시 소설이 가진 매력과 설득력을 전달하면서도, 소설적 상황 구성에 의해서 다양한 평가를 이끌어낸 침착한 문제작이었다. 이 소설은 과거 운동권 세대의 현재로서 암 환자로 죽은 아빠 태수의 장례식장에 상주를 맡은 딸 수민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과거 세대의 투쟁과 실패한 혁명이 담담하게 환기되며, 노골적이기까지 한 과거 세대에 대한 장례식장의 풍경이 겹쳐진다. 오늘날 혁명의 전유와 그 재의미화하는 얼마든지 사적인 방식으로 맥락화될 수 있으나, 이 소설에서 사적으로 전유된 혁명과 특정 세대의 장례식장 풍경은 분명 도발적이면서도 품위를 갖추고 있는 소설적 구성을 선보였다. 태수가 생전에 입양했던 유기견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소설의 결말 장면이 그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거나,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의 애도 과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우리가 현재에 혁명을 재발견하며 재발명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기존 운동권 당사자들이 자기 삶에 대한 회한을 썼다면 이제는 조소도 아닌 애틋함으로 아버지 세대를 바라보는 정서가 느껴진다는 심사위원 의견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손보미의 「끝없는 밤」은 단연 압도적인 소설적 긴장감으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총체적인 삶에 대한 복습이자 불가능하며 불가피한 자기 발견의 심리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억을 웃도는 가격의 보트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아홉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인 ‘그녀’는 그들을 감싸고 있는 적당한 거리감과 불안한 대화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이키며 애써 모르는 척 잊고 살아왔던 자기 삶 내부의 통증을 예민하게 감각해나간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큰 파도와 거센 바람이 요트를 흔들면서, 과민할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통증에 대한 강박을 되살리는 ‘그녀’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구축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을 그대로 재현한다. 동시에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불가피하게 삶을 반추하며 발생하는 거센 격랑 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그러한 삶에 대한 진실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붙잡으며 감각하는 순간의 믿음이란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는 점이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보트처럼, 삶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란 어쩌면 다시 되찾을 수 없이 애도되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 역시 「끝없는 밤」은 한 사람의 내면을 통증으로 인식하고 관념화하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는 점, 그리고 끊어지고 침몰할 것 같은 진실을 현기증 나는 세계 안에서 끈기 있게 추적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2차 독해 과정에서 만장일치로 손보미의 「끝없는 밤」을 2024년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이 갖춘 형식적 완미함의 미덕뿐만 아니라 그 소설적 물음의 끈기가 삶의 고통을 온전히 복원하려는 고고학적인 소설가적 태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서두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소설들은 자기와 정체성에 대한 선명한 정답이 도출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한 자신만의 이해 방식을 관철해나가는 중이다. 손보미의 「끝없는 밤」은 이러한 자기 이해가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타협과 절충의 유혹마저 거부하며 소설이 감당해야 하는 자기이해의 비극적 고통을 되살려냈다. 고통이란 겁이 많고 예민한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증폭되며 우리의 감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러한 고통을 실로 삼아서 바느질처럼 자신을 엮어내는 「끝없는 밤」의 자기 서술의 직조물은 우리 시대 근대적 소설의 화풍이 도달한 표현주의의 극치처럼 보인다. 2024년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에게 깊은 찬사와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또한 이 수상작품집에 함께 수록된 우수상 작품들은 우리가 처한 좌표 없는 세계에서 자기와 정체성을 섬세하게 매만지며 저마다의 소설적 좌표를 그려나가는 작가들의 훌륭한 응답들이다. 이러한 응답을 함께 엮어 한 권의 수상작품집으로 다시 소개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모든 수상자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제25회 이효석문학상 심사위원단
전성태, 편혜영, 정이현, 박인성, 이지은
(심사위원 박인성 대표 집필)
시상식
장 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문학관
일 시: 2024년 9월 12일(목요일) 오전 11시
시 상: 대 상 - 상패와 상금 5,000만원, 우수작품상(5명) - 상장과 상금 5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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