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벽공무한?을 중심으로-
김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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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서론 : 이효석 문학의 진폭(振幅)과 문화번역
2. 국민문학의 보편성 : ‘동화’에서 ‘교환’으로
3. 생활세계의 심미성 : ‘대체’에서 ‘연결’로
4. 여성댄디의 정치성 : ‘재현’에서 ‘참여’로
5. 결론 : 이효석 문학의 경계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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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효석 문학은 접근 방식이나 문학사적 평가에서 모순과 균열을 보이면서 커다란 진폭을 형성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런 진폭을 보이는 대표적 장편소설인 ?벽공무한?을 중심으로 이효석이 동양과의 관계 속에서 서양(구라파)을 어떻게 번역하고(2장), 그 실천 방법으로 예술(음악)을 어떻게 일상화시켰으며(3장), 그 행위 주체로서 설정된 여성댄디의 정치성을 위해 산책자나 남성댄디를 어떻게 재위치 시켰는지(4장)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효석은 기존의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 속에서 주변(로컬) 역사의 입장에서 중심(글로벌)을 모방하거나 전유하면서도 두 대립축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둘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사유하려고 했다.
서양이나 동양 어느 한편으로의 일방적 ‘동화’보다는 상호적 ‘교환’을 중시하고(2장), 일상을 예술로 ‘대체’시켜 수단시하기보다는 일상을 예술과 동등하게 ‘연결’시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3장), 응시의 주체가 행하는 ‘재현’보다는 생산의 주체가 행하는 ‘참여’를 통해 삶 자체를 정치화한다(4장). 이런 문화번역을 통한 ‘경계사유’로 인해 이효석 문학에서 서양과 동양, 예술과 일상, 남성과 여성 등 기존의 중심과 주변의 구성 요소들은 ‘대립적 분할’이 아닌 ‘불가피한 섞임’과 ‘쌍방적 변형’을 보이면서 그 경계가 해체된다.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 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7-361-AL0015)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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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이 지닌 보편성을 통해 새로운 보편성을 추구하고(2장), 일생 생활에서도 가능한 미적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심미성을 구현하며(3장), 고상한 정치성을 통해 매혹적인 정치성을 고안해낸다(4장). 이효석에게는 기존의 서양 중심적인 보편성, 예술지상주의적인 심미성, 한 정치성 자체가 무너져야 할 ‘또 다른 경계’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번역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효석 문학은 이처럼 기존의 경계를 무화시킴으로써 경계를 허물기 위한 대답 그 자체가 새롭게 제기되는 또 다른 경계에 대한 질문일 수 있음을 문학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주제어] 문화번역, 경계 사유, 로컬리티, 국민문학, 파시즘, 여성댄디
1. 서론 : 이효석 문학의 진폭(振幅)과 문화번역
모든 것을 말하는 작가도 드물지만, 한 가지만 말하는 작가도 드물다. 작가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말하기도 하고, 이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저것을 말하기도 한다. 때문에 작가를 평가할 때 작가가 말한 것과 더불어 말하지 않은 것 혹은 말하지 못한 것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효석(1907~1942)처럼 “알쏭달쏭하고 이상한 문학”1)을 한 작가로 평가받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오리온과 능금」처럼 동반자 문학을 통해 주목받았으면서도 후대에는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서정소설 중심으로 정전화 되었고, 「돈(豚)」이나 「들」처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중시했는가 하면 ?화분?처럼 남성동성애를 포함해 난교(亂攪)에 가까운 애욕의 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했으며,
「노령근해」나 ?벽공무한?에서는 러시아 여성과의 국제 연애를 이상화하면서도 일본어로 쓴 「봄옷」이나 「소복과 청자」와 같은 후기소설에서는 조선의 아름다움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효석은 평등한 계급을 그려도
불완전하다고 비판받고, 자유로운 성(性)을 중시해도 대상화시켰다고 지적받으며, 조선적인 것을 옹호해도 일본 제국에 공모한 것이라고 의심받는다. 즉 무엇을 말하건, 다른 무엇을 말하지 않아서 정 반대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
경우가 많다.
1)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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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의 연구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일관되게 이효석 문학의 모순과 균열을 꿰뚫을 수 있는 대표적 키워드로 ‘심미주의’, ‘낭만주의’, ‘파시즘’ 등을 내세운다. 첫 번째 ‘심미주의’ 경향을 강조한 이효석 문학연구는 탈이데올로기적 혹은 탈로컬적 성격을 통해 ‘미적인 가치 중립성’을 보여준다는 평가2)를 근간으로 하면서 ‘건강한 예술지상주의’의 중요한 사례라는 긍정적으로 평가3)와 서구 취향의 탐미주의를 통해 식민지 현실의 환멸로부터 도피했다는 부정적 평가4)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두 번째 ‘낭만주의’를 중심으로 이효석 문학을 연구하는 경우에도 이효석의 미학적 이상주의가 역동적 낙관론으로 연결된다는 옹호론5)과 더불어 전체주의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비판론6)이 동시에 제기된다. 친일문학론과 연결되기에 가장 논쟁적인 세 번째의 ‘파시즘’ 논의에서도 비협력이나 우회적 저항성을 보여주었다는 우호적 평가7)와는 정반대로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감을 봉합하려는 동일성의 수사학을 구사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식민주의적 시선을 강화시켰다는 비판적 평가8)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어느 하나의 키워드를 설정해 이효석 문학 전체를 꿰뚫어 보아도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는 양 극단의 평가는 여전히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효석 문학에 대한 평가가 이런 긍정과 부정의 양 극단으로 나뉘는 근거나 이유에 대한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재인식이 필요하다.
2)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작가의 일본어글쓰기론?, 서울대출판부, 2003, 276쪽 참조.
3) 이현식, 「이효석을 다시 보자」, ?이효석문학의 재인식?(문학과 사상 연구회 편), 소명출판, 2012,
69쪽 참조.
4) 이상옥, ?이효석의 삶과 문학?, 집문당, 2004, 131~132쪽 참조.
5) 정여울, 「이효석 텍스트의 공간적 표상과 미의식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12, 193쪽 참조.
6) 한민주, ?낭만의 테러?, 푸른사상사, 2008, 306~308쪽 참조.
7) 방민호, 「이효석과 하얼빈」, ?현대소설연구?, 35호, 2007; 김재용, 「일제말 이효석문학과 우회적
저항」, ?한국근대문학연구?, 24호, 2011; 김형수, 「이효석, ‘비협력’과 ‘주저하는 협력’ 사이의 문학」, ?인문학논총?, 제5권 1호, 2005.
8) 김양선, 「이효석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무의식의 양상」, ?현대소설연구?, 27호, 2005; 이경훈, 「식
민지와 관광지」, ?사이間SAI?, 제6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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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기존의 심미주의, 낭만주의, 파시즘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가 모두 ‘개인주의’9)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과 한계점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을 개인으로만 한정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가 존재해야 개인이 된다. 개인만 있으면 개인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는 자율성이 아닌 폐쇄성, 동일시가 아닌 소외,
변혁이 아닌 통제를 불러온다. 특히 이효석이 창작 활동을 했던 일본 식민지 시기에는 이런 개인과 사회의 관계 양상이나 그 결과 여부에 따라 문학적 평가가 엇갈릴 수 있기에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고찰해야 한다. 이효석 문학은 심미적 자율성이나 낭만주의적 동일시, 파시즘적 변혁 등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과 사회가 상호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 연구는 이효석 문학 속 개인이 주로 ‘문화적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러한 ‘문화적 개인’이 국가(2장), 예술(3장), 여성(4장)이라는 사회문화적 요소들과 어떤 관련성을 맺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실체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효석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서양(구라파)/동양(조선), 예술/일상, 남성/여성 등의 이분법적 대립을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듯이 이효석 문학에서 이런 두 대립항들 또한 영원히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효석의 다음과 같은 직접적 언급이 그 근거가 된다. 종교문학 물론 좋으며, 애욕문학 또한 좋고, 자연문학 또한 좋은 것이다. 국민문학이 나올 추세라면 그 탄생이 물론 기쁜 일이다. 건망증에 걸려 한 가지 제목에만
9) ‘개별성(particuiarity)’에 토대를 둔 ‘개인주의’가 사회 혹은 공동체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한계가 있으므로 전체와의 통합을 부정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를 의미하는 ‘개체성(singularity)’에 주목하해야 한다는 중요하고도 유의미한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김건형,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개체성의 미학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14) 그러나 세계를 전제하지 않거나 세계와 대립하지 않는 개별 혹은 개체는 불가능하기에 두 개념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기존의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365
오물하다 문학의 다양한 품질과 향기를 힐난함은 과분한 욕심이요, 쓸데없는 명예욕이다.
문학 상호의 방향과 양식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겸허함이 문학자의 진정한 태도일 듯하다. 문학의 진폭은 될 수 있는 대로 넓어야 함이로다.10) 인용된 부분은 문학 전반에 걸쳐 있는 주제나 장르 측면에서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나
국민문학11)의 출현에 대한 옹호에 방점을 두고 읽힐 수 있는 언급이지만, 이효석 문학 내부에서 보이는 불연속적이고 모순적인 양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적극적 옹호로도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이효석이 “문학의 진폭은 될 수 있는 대로 넓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문학의 다양한 품질과 기”나 “문학 상호의 방향과 양식”을 추구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실제 분석과 문학사적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효석 문학의 이런 진폭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단순히 이중성이나 양가성, 다양성이나 상대성에 대한 인정에 그치는 것은 또다시 그 진폭을 좁힐 위험성이 크다.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입장에서 양극단의 차이를 유지한 채 그 간극을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로 쉽게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이고 상호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기 위해 ‘문화번역’의 시각이 유효할 수 있다. 문화번역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의미 있는 해석을 만들어내는 행위”12)로서 “한 단어를 다른 언어로 대치하는 일반적 ‘번역’과는 다른 것으로, 타자의 언어, 행동방식, 가치관 등에 내재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13)를 말한다. 언어를 포함한 광의의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
10) 이효석, 「문학 진폭 옹호의 변」, ?조광?, 1940. 1,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 전집? 6권, 창미사, 2003,
252~253쪽. 앞으로 이효석의 소설이나 산문, 평론 등을 인용할 때는 이 전집에 의거하여 쪽수를
밝힌다.
11) “국민문학은 전쟁문학, 총후문학, 신체제문학, 국책문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다가 ?국민문학?
(1941.11)의 창간에 즈음하여 <국민문학>으로 통일된다. 국민문학은 <천황의 신민>이라는 신념을
가진 작가의 문학, 개인을 천황-국가에 복속시키는 문학을 일컫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김양선, 「공모와 저항의 경계, 이효석의 국민문학론」, ?작가세계? 2007년 겨울호, 56쪽.
본 연구에서는 이런 국민문학의 개념을 이효석이 어떻게 전유하고 번역하면서 기존의 국민문학
개념과의 경계 속에서 실제적으로 사용했는지 밝히도록 한다.
12) 김현미, ?문화 번역?, 또하나의 문화, 2005,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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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두는 문화번역은, 그래서 일방적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상태보다는 움직임, 결과보다는 과정, 전달보다는 수용을 중시한다. 문화번역의 행위가 “원본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도입”14)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효석은 ‘서양(구라파)’을 번역하고(2장), 그 실천 방법으로 서양의 ‘예술(음악)’을 번역하며(3장), 그것을 생산하는 주체로 ‘여성댄디’를 설정하면서 ‘남성산책자’나 ‘여성산책자’, ‘남성댄디’를 번역한다(4장).
이런 이효석 문학 속 문화번역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벽공무한?(1940)15)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벽공무한?에서는 조선의 문화사업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천일마(千一馬)와 러시아 여성 나아자와의 국제 연애가 하얼빈과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구라파주의’로 표방되는 서양 추구의 의미, 천일마를 사모하는 여성인물인 미려나 단영 중심으로 구체화되는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나아자의 ‘조선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 인정, 여성들만의 음악공동체인 녹성음악원의 이례적 건립 등을 통해 이효석 문학의 ‘진폭’을 확인할 수 있는 복합적 텍스트가 바로 ?벽공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을 통해 이효석 문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번역의 양상이 입체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그런 문화번역 행위를 통해 구성된 이효석 문학의 진폭이 과연 무엇을 위한 문학 행위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의도된 오역’ 혹은 ‘오역 아닌 오역’으로서의 문화번역이 이효석 문학에서 지니는 의의와 가치를 확인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13) 앞의 책, 48쪽.
14) 정혜욱, ?번역과 문화연구?, 경성대학교출판부, 2010, 18쪽.
15) ?매일신보?에 1940년 1월 25일부터 7월 28일까지 ?창공?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가 1941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제목이 바뀐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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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민문학의 보편성 : ‘동화’에서 ‘교환’으로
?벽공무한?은 실제 창작 시기나 작품의 배경 설정, 그리고 소설 속 사건 전개의 측면에서 볼 때 이보다 전에 발표된 소설 ?화분?(1939) 이후의 세계를 다룬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효석의 ‘구라파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화분?에서 주인공 영훈과 미란이 소설의 결말에서 떠나려는 곳으로 설정되었던 장소인 하얼빈의 표상이 ?벽공무한?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중심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분?에서 영훈이 하얼빈 행을 결심하는 이유는 “하얼빈만 가면 구라파는 다 간 셈. 인정으로 풍속으로 음악으로 하나나 이국적인 정서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16)라는 여행사 직원의 진술에 동의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영훈에게 하얼빈과 구라파는 “환영의 재현이요 꿈의 되풀이”
17)라는 점에서 동일한 기호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런 하얼빈 행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이효석의 구라파주의를 서구문화에 입각하여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서구 지향이나 상상적 동일시, 옥시덴탈리즘적 요소로
읽기도 한다.18) 그리고 이런 서구 지향성을 일본이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원시성이나 미개함에 대한 억압에 작가가 동조한 것으로 보아 ‘전도된 오리엔탈리즘’ 중심의 체제동원적 문학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9)
그러나 하얼빈으로 대변되는 ?벽공무한?에서의 구라파주의는 서구 자체에 대한 숭배나 상상계적 동일시라기보다는, 조선의 심미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당시 동양적인 것(비서양)을 중심으로 제국의 지배를 전시하려 했던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조선적인 것에의 경도 또한 일본이 추구하는 왕도낙토 건설을 위해 외쳤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뒤바꾼 ‘탈구입아(脫歐入亞)’를 통해 오히려 조선적인 것으로 동양적인 것
16) 이효석(1939), ?화분? 전집 4권, 247쪽.
17) 앞의 책, 247쪽.
18) 김주리, 「이효석 문학의 서구지향성이 갖는 의미 고찰」, ?민족문학사연구? 24호, 2004, 396~395쪽
참조.
19) 김양선(2005), 앞의 논문, 223~22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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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표하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효석이 비판했던 것은 ‘서구/동양’ ‘중심/주변’, ‘전체/부분’의 이분법적 대립 논리와 양자택일적 시각 및 그에 따른 차별이었다. 이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확인된다.
메주 내나는 문학이니 버터 내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 속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 내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듯, 한편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으로서 버터 내나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메주문학을 쓰던 버터문학을 쓰던 같은 언어의 세계라면 피차에 다분의 유통되는 요소가 있을 것도 사실이다.20)
이효석에게 중요한 것은 “메주 내나는 문학이니 버터 내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이 아니었다. ‘메주 내’와 ‘버터 내’ 중 하나로 특수성과 상대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터 내’를 우위에 두고 ‘메주 내’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던 ‘메주 내’의 문화를 격상시키려는 의도가 강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분의 유통되는 요소”이다. 이 때 “유통”의 의미는 일방적인 우열 관계에 토대를 둔 ‘동화’가 아니라 상호적인 차이를 전제로 한 ‘교환’의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동화의 개념이 차별이나 흡수를 묵과한다면, 교환의 개념은 차이와 공존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효석은 서양과 동양을 동시에 번역하면서 동화가 아닌 교환에 토대를 둔 문학을 중시한다. 어느 한 쪽만을 보면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고, ‘함께 보기’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위한 중요한 근거는 이효석 스스로가 구라파주의의 위험성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일마가 직접 방문한 하얼빈은 관념상의 이상향이 아닌 현실 속의 실제공간에 가깝다.21) 천일마는 무조건적인 동일시나
20) 이효석, 「문학 진폭 옹호의 변」, 전집 6권, 252쪽.
21) 김미란에 의하면 이효석의 실제 하얼빈 방문 이전에 씌어졌던 ?화분?과 달리, 하얼빈 여행 이후
연속적으로 발표된 소설이 단편 「하얼빈」(1940)과 장편 ?벽공무한?이다. 단편 「여수」 역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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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이 아닌 비판적 과정을 거쳐 서구를 서구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라파니 개인주의니 반지빠르게 배워가지고는 남녀동등이니 아내의 지위가 어떠니 철없이 해뚱거리는 꼴들이 가관이야. 몸에서는 메주와 된장 냄새를 피우면서 가제 깬 촌놈같이 날뛰는 것을 …… 복수는 다 무어야. 여편네가 사내에게 복수라니. 이 사랑 없는 가정을 누군 달갑게 여기는 줄 아나. 한꺼번에 다 부숴버릴 까부다.(161쪽)
이효석은 자신의 구라파주의가 맹목적인 서구 취향이나 일본에 대한 조선의 옥시덴탈리즘으로 호도될 위험성을 천일마의 옛애인 미려의 남편 유만해의 입을 통해 인용문에서처럼 간접적으로 발설한다.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인물의 발화로 간접화시켜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부딪힐 수 있는 현실적 오해와 오역의 가능성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이 일방적이거나 현실을 도외시한 결과가 아님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메주와 된장 냄새를 피우면서” “문명이니 문화니 하구” “촌놈같이 날뛰는 것”에 대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구라파주의나 개인주의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효석은 이런 현실적 위험성이나 제기 가능한 비판을 번역하면서까지 대안이나 해결책으로서의 구라파주의나 동양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방바닥에 앉아 얕은 식탁에서 조선 음식을 먹는 나아자의 자태가-문득 종세들의 눈에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비취어오면서 한때 거북스럽게 보았던 인상도 직후 씌어졌으나 하얼빈이라는 공간이 중심적인 서사 진행에 작용하는 것은 이 두 편이다. 이 두편에서 몰락하는 서구를 구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여되었는데, 「하얼빈」은 애수의 형식으로, ?벽공무한?은 구원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차이점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김미란, 「감각의 순례와 중심의 재정위」, ?상호학보? 38집, 2013, 18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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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에는 종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검든 붉든 말소리가 다르든 같든 차례진 생활의 잔치 앞에서는 피차가 같은 것이며 부자연할 것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생활 양식의 차이쯤이 근본적인 난관은 아니다. 밀을 먹든 쌀을 먹든 그 근본의 차이라는 것은 극히 사소한 것이다. 굳은 사랑이 있을 때 인류의 동화는 손바닥을 번기는 것보다 쉬운 노릇일지 모른다. (310쪽)
천일마가 나아자를 통해 서양(구라파)의 문화를 수용하였듯이 나아자도 천일마를 통해 동양(조선)의 문화를 체험한다. 이럴 때 부각되는 조선의 로컬리티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것’22)이기에 반제국적인 것이다.
“피차에 같은 것”이고 “생활 양식의 차이”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일마와 나아자의 결합에서도 구라파 사람과 동양 사람이라는 “근본의 차이”는 굳건하고 진실한 사랑을 토대로 할 때 “사소한 것”이 된다. 또한 궁극적으로
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인정한 상호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형성한다.23)
이런 측면에서 이효석이 ?벽공무한?에서 주장한 ‘세계주의’의 의미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효석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강화된 대동아공영권 아래서 ‘동양적인 것’을 인식하면서도 ‘서양적인 것’을 동시에 중시한다. 대동아 공영권의 실체가 ‘대동아=제국 일본=동양주의’라는 등식이기에 표면적으로는 지역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이 ‘지역’이 아니라 일본의 ‘지방’으로 위치 지어지는 현실24)을 극복하기 위해 이효석은 세계주의를 다시 번역하기 때문이다. “문학 속에 세계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세계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에 뿌리박은 국민성의 우수한 창조하면 그대로 세계문학에 놀라운 플러스가 되는 것이다”25)라는 인식하에 세계문학과 국민문학 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때문에 조선문학
22) 정실비, 「일제말기 이효석 소설에 나타난 고향 표상의 변전」, ?한국근대문학연구? 25호, 2012, 57쪽.
23) 강아람, 「이효석 소설의 정치성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2012, 78쪽 참조.
24) 오태영, 「‘조선’ 로컬리티와 (탈)식민 상상력」, ?사이間SAI? 제4호, 2008, 31쪽 참조.
25) 이효석, 「문학과 국민성」, 전집 6권,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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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민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럴 때 소설의 제목 ‘벽공무한’의 뜻인 ‘끝없는 푸른 하늘’ 자체가 “이질적이고 비대칭적인 문화들, 개체들의 삶이 생활 양식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로 동화될 미래적 공간”26)이라는 해석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효석은 서양을 통해 일본 제국 중심성을 탈피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고유성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그 또한 세계의 부분 혹은 하나로서의 지위만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동양(조선)의 문화를 민족주의적으로 강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용문의 “인류의 동화”는 서양 혹은 일본 중심으로 조선이 그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서로 ‘동등해지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효석이 구라파주의 혹은 서양 취향을 통해 조선 혹은 국가 개념을 번역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효석이 보인 친일 문학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지극히 비국민적 회의적 자유주의적인 국민문학을 가지고 국민문학을 했다”27)고 비판하는 기존의 부정적 평가는 오히려 이효석의 국민문학이 일본 제국이 요구하는 국민문학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긍정적 평가로 재위치 시킬 수 있다. ‘거의 똑같지만 동일하지 않은’ 모방의 양가성과 혼종성을 통해 제국 담론을 분열시키거나 전복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28) 이것이 바로 이효석이 “국민문학의 단 하나의 표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현재 각 작가가 힘쓰고 있는 문학이라면 그 모두가 일종의 국민문학 이어야 한다”29)라고 말한 진의(眞義)일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구라파주의”30)를 통해 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국민문학을 통해 획득하려는 것이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보편성은 전체주의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로컬 역사’의 차원에서 ‘글로벌 디자인’을 꿈꾸는 것이자,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느 곳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사유하는 방법”31)에 다름 아니다.
26) 방민호(2007), 앞의 논문, 59쪽.
27) 임종국(1966), 앞의 책, 331쪽
28) 호미 바바, 나병철 옮김, ?문화의 위치?, 소명출판, 2003, 226~228쪽 참조.
29) 이효석, 「문학과 국민성」, 전집 6권, 261쪽.
30) 정실비(2012), 앞의 논문, 49쪽.
372 한국학연구 제36집
이것이 바로 이효석 문학에서는 ‘동화’의 개념 자체가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의 ‘동일화’가 아닌 ‘동등화’로 번역되면서 두 문화의 ‘교환’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생활세계의 심미성 : ‘대체’에서 ‘연결’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효석에게는 하얼빈이 ‘동양의 모스크바’나 ‘동양
의 파리’로 불려 졌던 국제도시로서, ‘작은 서양’이자 ‘동양의 구라파’였다.
그리고 서양(구라파)은 완벽한 ‘미적 대상’이었다. 서양에 대한 추구가 경제 발전을 이룬 선진국이거나 전쟁에서 승리할 힘을 지닌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그리스 전통에 토대를 둔 예술의 전형이자 최고 수준에 해당되기에 추앙
되었던 것이다. “누가 서양을 숭배하나,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것이지. 아름다운 것은 태양과 같이 절대라나.”(170쪽)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효석에게 음악은 ‘서양적인 것=아름다운 것=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유진오의 ?화상보(華想譜)?(1938),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1939~1940), 이태준의 ?청춘무성?(1940) 등에서와 유사하게 예술 중에서도 음악에 대한 애호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음악인가. 소설 속에서 천일마의 하얼빈 교향악단 초청 사업을 통해 성사된 조선에서의 연주회는 실제로 1939년 3월에 있었던 조선 최초의 본격 교향악단 연주회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 연주곡목도 실제의 연주회와 일치하고,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동일하다.
하지만 소설에서와 달리 실제 연주회는 일본과 만주의 친선 및 방공 사상의 전파를 목적으로 일본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었기에 정치와 예술이 결합한 공연이었다.32) 무엇보다도 일제는 음악을 통해 식민지가 아닌 독자적 조선 사
31) 사카이 나오키, 니시타니 오사무, 차승기, 홍종욱 옮김, ?세계사의 해체?, 역사비평사, 2009, 8쪽
참조.
32) 윤대석, 「제의와 테크놀로지로서의 서양 근대음악」, ?상호학보? 23호, 2008, 119~12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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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라는 상상적 공간을 구축시켜 줌으로써 근대 음악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테크놀로지’로 사용했고, 연주회 또한 국민임을 재확인시켜주는 ‘제의’로 사용한 측면이 있다.33) 이런 기능으로 인해 체제 동원적인 예술의 성격에 대한
옹호와 연결되면서 파시즘적 미학으로 비판받을 여지를 제공한다. 파시즘과 결합한 미학에서는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구분하기 힘들거나 선후(先後)의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시대 상황 자체가 그런 파시즘적
미학이 생활 개조론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적 교화(reclamation)’를 통한 사회 재건의 체제 유지적인 기능을 간과할 수는 없을것이다.34)
그러나 ?벽공무한? 속에서는 이런 음악이 관객 혹은 국민을 선동하거나 교육시키려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조선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미학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실제로 음악이야
기가 주요 플롯인 장(章)의 소제목처럼 ‘생활 설계’의 측면 자체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효석은 음악을 통해 문화 자체에만 한정된 ‘보편적 미’가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삶의 미학화’를 이루려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중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왜곡된 음악을 ‘다시’ 혹은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고 싶은 욕망을 지녔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음악을 중시하는 양상을 보여도 그 목적에 따라 문화번역의 의미나 가치는 다를 수 있다. 이효석은 순수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음악을 순수한 것으로 번역하려고 한다. 일본 제국이 번역한 음악을 다시 번역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다음의 여러 인용문에서 확인되듯이
이효석은 음악이 정치가 아닌 예술, 관념이 아닌 생활 자체와 연관됨을 계속 강조한다.
1) 바로 조그만 이상국이게. 생활과 예술의 합치-얼마나 그리운 경치일꾸. (295
33) 앞의 논문, 133쪽 참조.
34) 백문임, 「정치의 심미화 : 파시즘의 미학」, 김철․신형기 외 지음,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 2001,
67~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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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2) 생활의 예술화라구 해두 좋지. 예술과 생활이 일치되어서 그 어느 한쪽도 뜯어내기 어렵게 화해버린 생활-그것이 인간 생활의 최고 이상이 아닐까. (296쪽)
3) 문화가 높은 사회일수록에 음악을 사랑하구 그것을 생활화하는 것이니 음악원의 뜻이 큰 것이요. (304쪽)
4) 설계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생활의 설계가 아니겠어요. 괴롭구두 즐겁
죠. (314쪽)
이런 맥락에서 일본을 국가로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 국민문학일지라도 그것을 이효석은 “국책을 반영하는 문학이 아니라 인간 생활을 탐구하는 문학”35)으로 번역함으로써 정치가 아닌 생활을 중시한다. 그리고 음악이 이런 생활의 심미화에 중요한 이유는 음악이 지닌 ‘구체성’ 때문이다.
사람의 사회가 아무리 변천한다구 해두 음악에 대한 사랑은 변할 날이 없을 것요. 문학이나 그림이 다 예술의 부분으로 큰 것이지만 음악같이 직접 마음을 울리구 흔드는 데는 한 걸음 뒤설 것요. 즐거울 때나 노여울 때나 슬플 때나 음악을 들으면 모든 감정이 완화되구 부드러워지니 사람이 참으로 화합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은 음악이 아닐까. 음악에 잠겨있는 뭇사람의 감정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고래의 허다한 정치가와 사상가의 이루지 못했던 인류의 이상적인 사랑의 나라를 수월하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음악에서 받는 순간의 영감은 사상가의 백가지의 이론보다도 더 즐겁고 효과적이요, 강렬한 것이니까-음악은 생활의 밥이요, 아니 밥 이상의 것일는지두 모르지. (305쪽)
우선 이효석은 생활의 심미화를 위해 음악의 구체성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흔히 감성의 혁명을 통해 확보되는 문학(예술)의 정치성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낮 시
35) 김형수(2005), 앞의 논문, 31쪽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375
간보다 휴식을 위한 밤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하면서 잠자는 대신 글을 쓰거나 읽고 토론함으로써 노동자의 시간 문화를 파괴한 것에서 확보된다.36) 때문에 ‘정치의 미학화’가 아니라 ‘미학의 정치화’에 가까운 ‘생활의 심미화’를 위해서 감성의 분할과 재분배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이것이 이효석의 ‘생활설계’에서 음악과 생활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문학이나 그림보다 음악이 더 우월할 수 있는 이유는 “직접 마음을 울리구 흔드는 데”에 더 적합하기에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이상적인 사랑의 나라”를 세울 때 “허다한 정치가나 사상가”가 이루지 못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때문이다. 정치보다 음악이 생활과 밀접해서 “백가지의 이론”보다 구체적인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심미화는 이효석이 중시한 ‘육체문학’의 개념을 통해서도 그 구체성을 다시 한 번 입증 받을 수 있다. 이효석에게 서양문학의 전범은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 문화였다. 그리고 헬레니즘은 “단지 막연하고 거대한 것이 아닌 실제적 형식과 육체적 구체 위에 서는 것”37)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육체문학은 정신을 “육체 만에서 오는 섭섭한 부족감을 위안시키기 위해서 발명한 한 가닥의 감상”38)으로 만들 정도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토록 정신이 비판받는 이유는 그것이 막연하고 거대한 것, 즉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이효석은 ‘서구문학=헬레니즘=육체문학=구체성의 문학’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여기서 더 나아가 ‘구체성의 문학=생활 속의 음악’이라는 또 다른 등식으로 번역한다.
생활의 심미화에 기여하는 음악의 기능으로 이효석이 주목한 또 다른 특성은 음악의 ‘공감 능력’이다. 이효석은 음악을 통해 생활을 변화시키려 한다. 이때의 변화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독자성, 파시즘의 정치성이나 전체성과는 다른 공동체의식 때문이다. 이때의 공동체는 취향이나 감각의 공동체일
36)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 b, 2008, 57~62쪽 참조.
37) 이효석, 「서구 정신과 동방 정취-육체문학의 전통에 대하여」, ?조선일보?, 1938. 7.31.~8. 2, 전집
6권, 235쪽.
38) 앞의 글, 239쪽.
376 한국학연구 제36집
수도 있고, 사랑의 공동체일 수도 있다. 그런 공동체를 통해 고립이나 통제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연대와 향유를 위한 일상적 목적으로서의 음악을 추구하는 것이다.
음악 속에 잠겨있는 일마와 나아자의 마음 역시 모인 수천 사람과 똑 같은 순간의 감정 속에 있었다.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한 빛으로 칠해진다. 푸른 물 속에 잠기면 다 함께 푸르게 물드는 것과 흡사하다. 일마들이 푸른물에 물든 눈으로 한결같이 무대 위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213쪽)
내선일체나 오족협화 등의 제국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킬 수도 있는 인용문의 내용은, 그런 현실적 오염을 인정하더라도 이효석에게는 그 방법이 음악을 통한 생활미라면 긍정적으로 번역 가능한 요소가 된다. 공감을 통한 감동이라는 미적 효과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효석에게 중요한 것은 미의 본질이 아니라 미의 효과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초월적 본성보다는 현재의 생활 속에 끌어들여 감상할 수 있는 현실적 기능이다. “미의 본질에 관한한 근본적 차이는 개재(介在)하지 않는 것이며 필요한 것은 그 감상의 태도요, 중요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의 감동을 탈취함이다”39)라고 직접 언급함으로써 이효석은 음악의 미적 효용성을 강조한다. 체제 긍정적이고 억압 은폐적인 기능을 할 수밖에 없는 음악의 위험성을 인정하더라도 이효석은 음악을 통해 바뀐 일상의 식민지 생활을 작품 속에 담음으로써 예술이 현실 속에서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을 개방시킨다. 그 결과에 대한 우려와 비난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위험과 한계를 무릅써야만 했기 때문이다.
음악의 이런 ‘구체성’과 ‘공감 능력’을 통해 이효석은 정치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정치와 ‘연결’되는 목적으로서의 음악, 그래서 정치에 종속되지 않고 정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음악을 추구한다. 정치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위한 정치, 즉 정치의 미학화가 아니라 미학의 정치화를 지향하기
39) 이효석, 「화춘의장」, ?조선일보?, 1937. 5. 4.~5. 8, 전집 7권, 141쪽.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377
때문이다. 이런 ‘생활과 예술의 일치’를 위해 이효석은 정치적인 것도 미학적인 것으로 번역하고, 예술적인 것도 일상적인 것으로 번역한다. ‘생활’과 ‘미’는 ‘둘 중 하나(either~or)’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both~and)’ 서로 ‘연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음악이 가장 정치적 동원 능력이 탁월한, 그래서 정치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효능을 지녔기에 이효석은 더욱 열심히, 그래서 더욱 위험하게 음악이라는 생활 예술을 심미적으로 번역했다고 할 수 있다.
4. 여성댄디의 정치성 : ‘재현’에서 ‘참여’로
?벽공무한?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대부분 예술가나 문화 사업가, 문화애호가이고, 문화에 대해 문외한인 천박한 속물들은 부정적인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효석의 미의식이 “천재에 대한 열광, 평범함에 대한 혐오,취미의 절대성에 대한 예찬”40)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효석 소설 속 인물들의 성격을 댄디즘(dandyism)과 연관시켜 파악 가능하다. 댄디즘은 유행을 따르는 모던 보이나 모던 걸과는 구분되는 정신적 귀족주의를 추구하면서 통속적 대중과 자신을 적극적으로 분리시킨다. 특히 문화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댄디는 도시를 배회하면서 수동적인 관조와 수집에 집중하는 ‘산책자’의 움직임과 달리 현실에 적극 동참하면서 자유를 실천하는 실천적 주체로서의 행위를 보여준다.41) 산책자가 사실의 관찰을 중심으로 한 ‘재현’에 중심을 둔다면, 댄디는 진실의 전달을 중심으로 한 ‘참여’에 더 중심을 둔다고 볼 수 있다.42) 즉 댄디가 산책자와 다른 점은 대중문화와 거리를 유지하
40) 권명아,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 책세상, 2009, 234쪽.
41) 미셸 푸코 외,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186~186쪽 참조.
김건형(2014), 앞의 논문, 17~18쪽, 106~119쪽 참조.
42) 이다혜, 「발터 벤야민의 산보객 개념 분석」,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7, 54~57쪽 참조.
김건형(2014)은 이런 산책자와 댄디의 차이에서 박태원이나 이상, 김기림 등의 구인회 멤버와 이효
석 사이의 갈등 요인 및 탈퇴의 단서를 찾고 있다. 그리고 여성댄디들이 지닌 도시문화와 소비주의
378 한국학연구 제36집
면서 관찰이나 비판을 주로 행하지 않고 문화를 직접적으로 소비하는 한편 문화 생산에까지 직접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남성댄디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여성댄디는 ?벽공무한?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자신을 창조하여 스스로 ‘예술품’이 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는 여성 주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앞으로 건립될 녹성음악원을 책임지고 운영할 여성댄디들을 중심으로 교향악, 영화, 금광, 복권, 경마, 마약 등 여러 문화코드가 등장하기에 문화형성소설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미성숙에서 성숙한 단계로 혹은
실패에서 성공으로 발전하는 여성성장소설적 특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특징적인 것은 당대의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권을 강조하는 일제 말기 상황에서 소위 ‘군국의 어머니’나 ‘총후 부인’의 표상과는 다른 여성인물들을 등장 시켜 그녀들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성을 부여한 것이다. 다른 남성작가들이 보여주는 여성인물들의 모습이나 이효석 자신의 ?화분?과같은 다른 소설들과도 다른 면모이다.
지금껏 여성댄디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그녀들의 문화 소비 행위 자체가 자기만족을 통해 적극적으로 욕망을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었다.
근대 부르주아 남성 주체가 제시하는 자기절제의 윤리와는 다른 젠더적 차이에 집중한 결과이다.43) 그러나 ?벽공무한? 속 여성 댄디들은 이런 소극적 문화 소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로까지 나
아간다. 허무하고 타락한 측면에서만 도시 문화를 보지 않고 희망이나 활력에 찬 측면에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창출하려는 의욕을 보인다. 이로써 최후의 종착지가 백화점인 남성산책자도 아니고, 최초의 행선지가 백화점인 여성 산책자도 아닌44) 여성댄디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미려들의 모임이 엄숙하고 의젓한데 비겨 한 쌍의 좋은 대조였다. 세 사람 여자의 함의를 여성인물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43) 리타 펠스키, 김영찬 외 옮김, ?근대성과 젠더?, 자음과 모음, 2010, 123~125쪽 참조.
44) 서지영, ?경성의 모던걸?, 여이연, 2013, 4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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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엄숙한 자태가 새로운 계획과 사업에 확실성의 인상을 준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임의 분위기는 그것으로서 사업의 전도를 축복하고 예상하기에 족한 것이라면 일마들의 모임이 평화롭고 단란한 것은 또 그 모임의 성질로서 적당하게 어울리는 것이다. 앞으로는 안온하고 단란한 생활의 경영만이 남은 일마 부부이다. 격동과 흥분은 두 사람에게는 벌써 지나가버린 경력이다. 미려와 일마의 두 생활의 설계가 각각 감격과 기쁨을 품으면서도 그 모임에 나타난 인상이 다른 것은 그런 점에 원인된 것이었다. (308쪽)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녹성음악원을 통해 여성인물들은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던 문화 사업을 실천하려고 한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여성들 만의 공간을 이상향으로 추구함으로써 그러한 꿈과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여성공동체가 천일마와 나아자의 가정생활이나 예술생활과 병행해서 추구된다는 사실이다. 미려와 단영, 혜주는 천일마를 중심으로 한 남성댄디들이 이루어놓은 문화 사업을 전범으로 삼거나 모방한 것이다. 때문에 사회 전체로 보아서는 녹성음악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공동체들도 존재한다. 단지 “그런 색다른 단체가 생긴다는 것이 문화 향상의 한 좌증”(308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해 대립시키면서 분리주의적인 시각에서 여성들만의 폐쇄적이고 비현실적인 조직을 비약적으로 설정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댄디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일마와 나아자가 포함된 신문사 회식 자리와, 미려와 단영이 주최한 모임 자리가 나란히 소개되고 있는 인용문의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벽공무한?에서 추구하는 음악이 실현된 생활은 ‘더 좋은 세계’가 아니라 ‘더 고상한 세계’이다. 계몽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의 세계는 파시즘 미학의 목표인 집단적 민족주의나 권위적 영웅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녹성음악원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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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낭만주의적 동일시나 개인주의에 침몰되어 개혁이나 변화에는 무관심한 채 유토피아적 비전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녹성음악원은 척박하고 억압적인 현실에 토대를 두고 싸워서 쟁취해야 할 것이기에 ‘미래의 꿈’이 아니라 ‘현재의 과업’이다. 때문에 “단독적인 것에 대한 집단적 이념의 구현물”45)로서 댄디가 구현하는 문화는 이효석에게는 원초적 한계가 아닌 기본적 조건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산책자와 댄디,
남성과 여성, 여성과 다른 여성 사이의 경계에서 예술을 실천해야 하는 여성인물들의 실존적 선택이자 실천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녹성음악원은 소설 속 여성댄디들이 불완전한 현실에서 현실적으로 추구해야 할 ‘공동구락부’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선발 시험의 표준은 학력보다두 용모에 두어 가지구 될 수 있는 대로 미모의 여성만을 모아서 교육시킬 것-이것이 녹성음악원의 무엇보다두 첫째의 방침이래야 해. 아무리 교육의 기회 균등이니 무엇이니 해두 예술에 뜻을 둔다는 것부터가 선발된 특권이구 기회가 달러진 증좌가 아니겠수. 용모를 본다는 것은 예술적 재능에다 또 한가지의 조건을 더 붙여서 완전한 최상의 예술가를 맨들자는 뜻인데 같은 예술이래두 그림이나 문학은 자가가 스튜디오나 서재에서 혼자 숨어서 제작한 결과를 사람에게 보이거나 읽히면 그만이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특히 그 연주의 경우에는 반드시 음악가 자신이 무대 위에 나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과 용모두 가지의 매력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줌이 한층 값두 높구 뜻도 깊구 인생의 기쁨을 더해 주는 것이거든. 용모 제일을 주장하는 내 뜻이 곡해되구 비난을 받기가
첩경 쉬운 노릇이지만 그 진의를 곰곰이 음미하면 반드시 내 주장을 따를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돼요. (294쪽)
인용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음악에 있어서의 용모제일주의는 음악의 본질이 아닌 부차적 요소라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측면이 강하지만, 문
45) 백문임(2001), 앞의 논문,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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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이효석 본인도 그런 오해와 비난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용모 제일을 주장하는 내 뜻이 곡해되구 비난을 받기가 첩경 쉬운 노릇”임을 알면서도 이효석이 소설 속에서 용모를 중시한 이유는 예술적 재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매력”을 겸비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이나 그림처럼 개인 예술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교향악이나 합창처럼 “무대 위에 나서는” 집단 예술일 경우에는 자신의 몸을 응시의 ‘대상’으로 만듦과 동시에 그런 자신을 다시 바라봄으로써 응시의 ‘주체’로서도 자리매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듯, 댄디는 자기 몸으로 사람을 즐겁게 한다.”46) 음악을 외부에서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용모제일주의를 비판하기 쉽다. 그러나 음악을 내부에서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미적 가치를 타인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노출시키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타인에 의한 대상화에서 벗어나 은밀한 자아정체성을 형성할 수도 있다. 고급한 엘리트주의자로서의 선민의식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자아정체성이나 정신적 태도를지향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벽공무한? 속 여성댄디들은 미를 추구하면서 스스로 미가 되고자 한다.
자신들을 음악과 동질화시키면서 음악처럼 스스로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흔히 댄디즘 논의에서 댄디가 비판받는 이유는 개인을 미적 범주로 설정하여 미적 개인주의에 빠짐으로써 자폐적인 비정치성에 함몰되거나, 공공 영역으로부터의 배제를 통해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보인다는 것이다.47) 그러나 이효석의 여성댄디는 이런 댄디의 위험성을 다르게 모방하고 새롭게 번역함으로써 미적 개인주의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여성댄디는 언제나 타인의 ‘응시를 응시’하기에 타인을 언제나 고려한다. 집단이나 민족을 내세우지 않지만 거기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근대의 속물적 삶을 거부하거나 조롱하지만 그 바깥에서 살 수는 없음을 인정한다. 때문에 비정치적인 ‘모더니스트 댄디’
46) 고봉만, 「조지 브러멀의 댄디즘에 대하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31집, 2010, 8쪽.
47) 댄디즘과 파시즘의 결합 양상에 대해서는 김예림의 「근대적 미와 전체주의」(김철․신형기 외,
2001)를 참조할 것.
382 한국학연구 제36집
가 아니라 정치적인 ‘아방가르드 댄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48) 이효석의 정치성이 미학의 정치성이라면, 녹성음악원 여성댄디의 정치는 미래가 아닌 현재, 공상이 아닌 이상, 욕망이 아닌 행위, 소비가 아닌 생산을 통해 현실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 댄디들의 ‘정치성’이 확보된다.
이렇게 볼 때 ?벽공무한? 속 여성댄디들은 응시의 주체로서 예술을 ‘재현’하면서도 거기서 더 나아가 생산의 주체로서 예술에 ‘참여’한다. 응시의 대상이자 응시의 주체였던 여성산책자들에 대한 문화번역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이들 여성댄디들은 남성댄디들의 ‘욕망’을 모방하지 않고 그 ‘행위’를 모방한다. 남성댄디들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서사’라는 욕망의 주체로서 자리 매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들에게는 ‘백화점’이 아닌
‘음악원’이 중요한 장소성을 지니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상품’이 아닌 ‘예술품’으로 자신을 번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5. 결론 : 이효석 문학의 경계사유
모든 문화번역이 완벽하게 원본문화와의 일치를 보여줄 수 없다면, 어떤 문화번역도 불완전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본 연구가 ?벽공무한?을 중심 텍스트로 설정했으면서도 메타비평의 입장에서 이효석 문학에 대한
기존 논의를 원본으로 삼아 그것을 ‘다시’ 읽고, 상호텍스트적 입장에서 이효석의 다른 소설이나 평문, 산문들을 적극적으로 ‘함께’ 읽은 이유도 거기에 근거를 둔다. 이효석 문학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과감하게 다시 번역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이런 문화번역을 통해 이효석 문학에 대한 도식적 이해나 이분법적 평가에서 벗어나 새로운 번역을 시도해 본 것이다. 이효석 문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전화 혹은
정치적 단죄 중에 양자택일할 것이 아니라, ‘의도적 오역’ 혹은 ‘오역 아닌
48) 앞의 논문, 182쪽 참조.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383
오역’을 통해서 그런 평가의 내적 계기나 심층적 과정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효석을 문화번역의 ‘대상’이 아니라 문화번역의 ‘주체’로 재설정해야 가능한 사후적 문학번역 작업이기도 하다.
이효석은 기존의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 속에서 주변(로컬역사)의 입장에서 중심(글로벌 디자인)을 모방하거나 전유한다. 두 대립축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둘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사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49) 이런 이유로 이효석의 경계사유는 “세계를 이분법으로 질서지우기 보다는 이분법적 개념들에서 사유한다.”50) 기존의 이분법을 와해시키기 위해 이효석은 중심의 권력을 모방하면서도 거부하고, 주변의 타자성을 거부하
면서도 모방한다. 서양이나 동양의 어느 한편으로의 일방적 ‘동화’보다는 상호적 ‘교환’을 중시하고(2장), 일상을 예술로 ‘대체’시켜 수단시하기보다는 일상을 예술과 등등하게 ‘연결’시켜 그 자체가 목적이 되게 만들며(3장), 응시의 주체가 행하는 ‘재현’보다는 생산의 주체가 행하는 ‘참여’를 통해 삶 자체를 정치화한다(4장).
이런 문화번역을 통한 경계사유로 인해 이효석 문학에서 서양과 동양, 예술과 일상, 남성과 여성 등의 중심과 주변의 구성 요소들은 ‘대립적 분할’이 아닌 ‘불가피한 섞임’과 ‘쌍방적 변형’을 보이면서 그 경계가 해체된다.51) 경계의 구분이 모호하기에 안과 밖이 따로 없고, 의미와 가치도 유동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경계사유를 통해 이효석은 대립적 요소들에 대한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완전한 번역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려준다. 로컬이 지닌 보편성을 통해 새로운 보편성을 추구하고(2장), 일생 생활에서도 가능한 심미성을 통해 살아있는 심미성을 구현하며(3장), 고상한 정치성을 통해 매혹적인 정치성을 고안해낸다(4장). 이효석에게는 기존의 중심을 토대로 한 보편성, 예술지상주의적인 심미성, 비
49) 월터 D. 미뇰료, 이성훈 옮김,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에코리브르, 2013, 50쪽, 78~79쪽,
138쪽 참조.
50) 앞의 책, 151쪽.
51) 김수환, 「전체성과 그 잉여들」, ?탈경계 시대의 지구화와 지역화?(이화인문과학원 편), 이화여자대
학교 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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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한 정치성 자체가 무너져야 할 ‘또 다른 경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기에 중심과 주변의 대립은 순간적으로는 극복될 수는 있으나 영원히 초월할 수는 없다. 이럴 때 가능한 것은 움직이는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그만두지 않는 것뿐이다. 이효석이 일제 말기에 시도한 국가, 예술, 인간 등에 대한 문화번역이 지금도 해석의 해석, 평가의 평가, 번역의 번역을 낳으면서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탈경계를 기획하는 첫걸음은 경계 자체에 대한 치열한 되묻기”52)라는 전언이 타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본 연구 또한 이효석 문학의 경계사유에 대한 대답이 아닌 질문에 해당하기에 새로운 질문으로 다시 (재) 번역되어야만 할 것이다.
52) 김수환, 「‘경계’ 개념에 대한 문화기호학적 접근」, ?지구지역 시대의 문화 경계?(이화인문과학원
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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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 387
Cultural Translation and Border Thinking in Lee
Hyo-seok’s Novels
-Focused on Byeokongmuhan-
Kim, Mi-Hyun
Lee Hyo-seok’s works are considered to be radical and segmented.
Byeokongmuhan is the most effective text to observe such complexities as it
portrays various themes that are at the core of existing debates, such as
inclination towards Western culture, eroticism, estheticism, and pro-Japanese
issues. This study aims to look at the various topics that Byeokongmuhan
covers, such as ‘nation’, ‘art’, and ‘women’, from a culture translation point
of view. Lee Hyo-seok does not consider that the East and the West are in
dichotomy; one does not have to choose one over the other. He emphasizes
the possibility of ‘exchange’ by translating the West in the eyes of the East,
and the East in the eyes of the West (Chapter 2). He also stresses the
importance of art, based on the belief that the West symbolizes universality
and beauty. Art, especially music, is considered as the fundamental material
to realize ‘beauty’ in everyday life and thus the vehicle that ‘links’ art to life
(Chapter 3). ‘female dandy’ is considered as the agent of music. Lee tries to
‘transform’ reality by advocating female dandy which focuses on ‘enjoyment’
and ‘production’, rather than ‘Flâneur’ or ‘male dandy’ which centers on
‘observation’ and ‘criticism’ (Chapter 4). By putting culture translation into
practice in a position of singularity, Lee Hyo-seok demonstrates ‘b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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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 which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the intersection of ‘local history’
and ‘global design’ (*).
Key words : culture translation, border thinking, locality, nation, fascism,
female dandy
논문투고일 : 2015년 1월 15일∥심사완료일 : 2015년 2월 13일∥게재확정일 : 2015년 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