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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포커스 / 우리가 몰랐던 작가 이효석(上)

메밀꽃 필 무렵 2022. 8. 7. 17:16

엄혹한 일제말 '메밀꽃'만 탐닉 했을까…이효석작품 곳곳엔 '反日 매운꽃' 가득

 

일제강점 매서운 시대에

대놓고 말못한 反日·反戰

 

희곡 `역사`엔 내면적 고뇌

예수의 가르침에 빗대어

운명적 선택의 길 암시

 

2차대전 당시 쓴 `하얼빈`

먹고 먹히는 전쟁의 참극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내

 

자전적 소설 `풀잎`에서는

등화관제에 저항함으로써

일본의 전쟁정책 비판한셈

 

                                                                                        입력 : 2022.08.02 17:02:13수정:2022.08.02. 20:00:49

 

 

◆ 매경 포커스 / 우리가 몰랐던 작가 이효석(上) ◆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지나간 작가에게 한 번 부여된 이미지는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 작가 이상이 금홍과의 스캔들성 이슈와 '날개'(잡지 '조광' 1936년 9월호) 한 편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듯이 이효석(1907년 4월 5일~1942년 5월 25일)은 '메밀꽃 필 무렵'('조광' 1936년 10월호)의 작가로 간략하게 압축된다. 이 작품에 나타난 달밤 산길의 눈부신 묘사와 이 서정적 풍경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연이 작가 이효석의 이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가 진정한 문학의 길을 묻고, 탐구하고,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치며 자신만의 매운 꽃을 피워 올린 작가라는 사실은 자주 잊히곤 한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봉평 메밀꽃 축제가 더욱 풍요로워질수록 이효석의 이미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적인 작가라는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다.

 

그의 사거(死去) 80주년이 되는 올해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효석 문학의 진면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일제 말기에 이효석이 어떤 작품들을 남겼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희곡 '역사'가 말하려 한 것

이효석 희곡 `역사` 첫 페이지. [사진 제공 = 이효석문학재단]

 

1939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기로 했고, 머지않아 잡지들마저 폐간될 운명이었다. '문장'은 가람 이병기와 이태준, 정지용이 주도한 한국어 문학의 심장과도 같은 잡지였다. 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이효석은 '역사'라는 이름의 희곡 한 편을 발표한다. 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희곡은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들의 운명에 대한 천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효석은 시공간적으로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예수의 시대로 독자들을 이끈다.

 

바야흐로 예수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 마리아와 마르다, 나중에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유다 그리고 마리아를 사랑하는 토마스 등이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가난한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를 나흘 만에 죽음에서 소생케 한 후 예수는 그의 누이들의 초대를 받는다. 마리아는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예수의 발등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여인이다. 토마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당시에 '열심당'(젤롯당)이라고 불리던 무력 투쟁 집단의 일원이다. 열심당은 수탈을 일삼는 로마제국과 헤롯 왕의 압제에 희생적인 투쟁으로 항거하고자 했다. 세 개의 길이 이 작품 속에서 제시된다. 하나는 토마스의 길을 따라 무력 투쟁의 길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길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유다처럼 물질적 이욕에 사로잡혀 숭고한 길을 저버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길이 올바르며 가야 할 길인가?

 

1939년은 당시 문학인들에게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본격적인' 대일 협력의 길에 접어들었다. 자하문 너머 세검정에 있던 별장을 파는 이야기 '육장기'('문장' 1939년 9월호)에서 이광수는 장편소설 '사랑'이 보여준 종교 통합적인 사랑의 길 대신에 당면한 전쟁을 승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채만식은 '냉동어'(잡지 '인문평론' 1940년 4~5월호)를 통하여 엄혹한 감시와 억압의 시대의 '냉동어'처럼 꽁꽁 얼어붙은 지식인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그가 나중에 '민족의 죄인'(잡지 '백민' 1948년 10월호)에서 명명한 '대일 협력'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유다'가 되는 길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다른 무력 항쟁의 길이 있을 수 있었다. 도쿄제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아쿠타가와상 후보작가로까지 올랐던 김사량(1914년 3월 3일~1950년 10월?)은 중국에 파견된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실제로 무력 항쟁의 길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저 옛날 예수의 가르침처럼 세속적 항거나 투항 그 어느 쪽도 아닌 종교적 승화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는가? 이 길은 너무나 좁고 앞에 제시된 두 개의 길보다도 이해받기 어려운 길이었다. 희곡 '역사'를 통하여 이효석은 당시의 한국인들, 문학인들 앞에 펼쳐진 운명적 선택의 길을 보여주고 그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내면적 고뇌를 겪고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이 희곡은 그러니까 일종의 알레고리, 당시 한국인들의 운명적 선택의 문제를 예수의 시대 그것에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 이효석이 꿈꾼 '다른 우연'

이효석의 호는 가산(可山)으로 1907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1939년 평양 대동공전 영문학 교수 시절. [사진 제공 = 이효석문학재단]

 

이 무렵 이효석은 평양숭실전문의 교수에서 대동공업전문의 영어 및 독일어 촉탁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촉탁'이라 함은 일종의 비정규직을 의미할 것이다. 숭실전문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1938년 3월 폐교된 후 1939년에 다시 그렇게라도 취직한 것이다. 1940년 2월에는 아내 이경원이 세상을 떠나고 갓난아기였던 차남 영주까지 잃는다.

 

이 시기에 이효석의 삶은 가족사적 차원에서나 공적인 측면에서나 커다란 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무렵을 전후로 하여 이효석은 자주 중국 하얼빈을 여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장편소설 '화분'(1939년 9월 인문사 펴냄), 단편소설 '하얼빈'('문장' 1940년 10월호), 다시 장편소설 '벽공무한'(1941년 8월 박문서관 펴냄) 등은 그러한 여행의 산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는 이 엄혹한 시기에 그렇듯 '한가한' 여행을 떠나곤 했던 것일까?

 

이효석 소설 `하얼빈` 첫 페이지. [사진 제공 = 이효석문학재단]

 

오늘날 우리에게 이효석의 이미지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서정적 소설을 쓰고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년 12월 조선문학독본으로 발행) 같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 아궁이에 불을 때며 인생을 음미하는 고고한 취미에나 사로잡혔던 것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효석이 서울을 떠나 한국 사회 '변두리'로 떠돌고 그곳에서의 삶을 고수한 것과 만주국 도시 하얼빈을 오간 것은 당시 한국 사회의 중심 지향성, 폐쇄성을 향한 말 없는 저항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단편소설 '하얼빈'은 바야흐로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머지않아 닥칠 태평양전쟁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된 이후의 하얼빈으로 여행을 간다.

 

그사이에 하얼빈의 도시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도시에 설치되어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사관도 철거되다시피 했다.

 

주인공이 만난 러시아 여자 유우라는 이 도시도 벌써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원래 하얼빈은 러시아가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하면서 개척한 도시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서양 각국이 다투어 진출하면서 동서양의 문화가 합류하는 독특한 세계 문화의 접경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전체주의 국가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세계사의 현실을 향해 "우연한 결정"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렇다면 이 "현재와 다른 우연의 결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독백한다. 이것은 이효석이 이 전쟁에 대해 결코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현대사는 당시 독일과 일본이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2차 대전을 확전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동맹을 맺으면서 '추축국'을 형성해 영·프·미 중심의 연합국 측과 대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효석 소설 '하얼빈'이 발표된 시기가 1940년 10월이라는 사실은 이효석이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아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음을 예증한다.

 

◆ 일제의 전쟁을 반대한 작가

이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문제작 '풀잎'(잡지 '춘추' 1942년 1월호)의 존재가 각별히 부각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준보는 아내를 잃어버린 실의의 시기를 딛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준보'라는 이름은 그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시사하는 징표 가운데 하나다.

 

이효석은 작품 속의 자기를 가리키기 위해 준보 또는 학보, 현보 등의 이름을 썼다. '풀잎'은 이효석과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의 실제 사랑을 소설로 '옮긴' 것이어서 작중 준보와 옥실은 등화관제가 실시된 평양의 뒷골목을 함께 산보한다. 등화관제란 적기의 내습에 대비하여 도시의 불빛을 모두 꺼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책을 함께한다는 것은 자칫 국책에 저항하는 것으로 처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준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내적 논리는 이러하다.

 

헐어진 가정을, 싸어서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야 하고, 고독을 다스려서 보다 높은 사업을, 이루워야 함이, 인간 경영에 주어진, 영원한 과제인 까닭이다. 자멸의 길을 버리고, 창조의 길을, 찾어야 함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오는 까닭이다.

 

여기서 이효석은 일제가 추진하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논리와 인간의 고도의 창조 행위로서의 사랑을 선명히 대비시킨다. 인간은 "자멸의 길을 버리고" "창조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이로써 이효석의 반전적 태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행간에서 일제의 전쟁정책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이 '풀잎'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이는 미국의 현대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집 'Leaves of Grass'를 인유한 것이다. 휘트먼은 사랑과 평화, 인류애를 고창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일제강점기의 한국 문학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찍이 미국에 유학한 평양 출신 문학인으로 흑인문학을 소개하기도 한 한흑구 역시 휘트먼의 방랑적 삶에서 자기 문학의 지향점의 하나를 찾기도 했다. 작중에서 준보는 옥실에게 휘트먼의 시구절을 낭송해준다.

 

나는, 여성의 시인이며, 동시에, 남성의 시인이니라.나는 말하노라, 여자됨은, 남자됨과 같이, 위대한 것이라고.또, 말하노라, 남자의 어머니됨같이, 위대한 것은, 없노라고.

 

여기서 준보는 휘트먼의 시구절을 빌려 "여자됨"은 "남자됨"같이 "위대한 것"이며, 나아가 "남자의 어머니됨같이" "위대한 것은" "없노라"고 말한다. 남성적 폭력과 투쟁이 지고한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이효석은 '여성성'의 미덕을 고창한 휘트먼을 통하여 일제가 추구한 전쟁의 허망함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이다.

 

◆ 소설 '은은한 빛'과 고구려 도검

이효석에 대해 미심쩍어 하는 시선 가운데에는 그가 일제 말기에 몇 편의 일본어 소설을 발표한 것을 염두에 둔 것도 있다. 한국어가 억압당하던 그 시기에 일본어 소설을 쓴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금 팽대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 단편소설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김사량이 끝내 망명 무력 저항의 길을 걸었던 사실이 시사하듯이 '일본어 소설=대일 협력'이라고 등식화하는 것이 반드시 타당하지만은 않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몇 편은 국책적인 소재를 다룰 때도 그것이 노골적인 대일 협력적 태도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며, 무엇보다 'ほのかな ひかり(호노카나 히카리, 은은한 빛)'(잡지 '문예' 1940년 4월호)의 주인공인 조선인 골동품상 '욱'은 일본인 박물관장 '호리'가 탐내는 고구려 도검을 결코 그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서 빛나는 고구려 도검이 일종의 상징적 암시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일본어 잡지에 일본어로 소설을 발표하면서 그 독자들을 향하여 빛나는 고구려 도검을 결코 일본인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하는 조선인 청년의 형상을 그린 것은 이효석의 정신적 태도를 강하게 내비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일제 말기라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간 이효석의 작가적 태도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으며, 또 그렇다면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다음 글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가기로 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 매일경제 &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