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론

제16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가, 전성태<두 번의 자화상>작품론

메밀꽃 필 무렵 2019. 5. 9. 16:53



2015 이효석문학상 수상 작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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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애도와 단 하나의 이야기

- 전성태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창비, 2015)이 그려내는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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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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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두 번반복되는 자화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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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자화상?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왜 자서전이 아니라 자화상인가와 같은 것. 소설은 서사이고 이야기되는 것인데, 굳이 소설로 그려내는 자화상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그리고 커지는 궁금증. 어째서 두 번째의 자화상이 아닌가. 어째서 두 개의 자화상도 아닌가. ‘두 번째의 자화상도 아니고 두 개의 자화상도 아닌 ?두 번의 자화상?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글은 이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겨울 동안 두 번째 자화상을 그려서 이 소설집에 수록하고 싶었으나 연이 닿지 못했다”(작가의 말)고 말했다. 그러므로 기실 두 번의 자화상이란 두 번째 자화상에 대한 실패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번째 자화상도 그렸는데, 두 번째라고 그리 어려울까.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어려운 것은 두 번째그림이 아닌, ‘두 번의 그림이다. 그리고 전성태는 두 번의 자화상을 그릴 줄 아는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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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두 번째처럼 순차적이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두 개처럼 시간성이 배제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상상해보면 어떨까. ‘두 번은 두 번째와 두 개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정확히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마치 시간의 틈에 걸쳐 있는 어떤 것처럼, 시간에 균열이 발생한 것처럼, 동일성이 반복되는 양상을 가리킨다고.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인터넷 연결이 끊긴다면, 영화는 멈춰버릴 것이다. 버퍼링으로 인해 멈춰진 서사는 순간적으로 반복되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것은 두 번 반복될 테고, 우리는 영상의 흐름을 놓쳐 우왕좌왕할 테고, 결국 반복되는 장면 자체에 집중하게 될 테다. 다시 한번 묻는다. 때로는 우스꽝스러울지도, 때로는 기괴할지도 모르는 그 장면은, 균열된 시간 속에서 틈을 만들며 반복되는 두 번의 장면자화상,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키기 위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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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는 첫 소설집에서부터 장인성과, 시류를 따라 쉽게 변화해 가지 않는 세계를 가진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따라서 그 세계가 과연 지금 요구되는 작가의 면모와 부합하느냐가 문제시되는 작가였다. 물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남녀는 말 그대로 서로를 잡아먹으며, 외계인이 지구를 공격하는 최첨단의 소설들과 비교할 때, 아직도, 혹은 여전히 전성태의 소설은 민통선 근처에, 가난한 재개발 지역에, 금강산 관광 중지로 고향에 갈 수 없는 노인들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전성태가 시의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유행을 신경 쓰지 않는 작가라고 말하지는 말자. 그가 1997년에 쓴 은 화전(火田)을 일구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길을 떠나는 남녀의 이야기였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도 끝나가는 무렵, 그는 과감히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자화상은 자전적이라는 말에 의미를 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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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란 대체 무엇인가. 유행(fashion)은 반드시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행은 변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게도 유행은 시간에 불연속성을 가져온다. 유행의 변화를 통해 또한 한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유행의 단절은 시간을 분절하는 기능을 한다. 문제는 유행이 지금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 처음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그때 유행은 아직오지 않았다. 우리가 대부분 그러하듯 다른 사람들의 스타일을 따라 옷을 입게 될 때, ‘이미유행은 도착해 있는 상태다. 이처럼 유행의 시간은 항상 아직이미 지난사이의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에 존재한다. ‘유행의 시간은 그 자체보다 앞서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항상 너무 늦는 것이다.’

따라서 유행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늘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혹은 맞지 않아야 한다. 유행은 지금과 비껴서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시간과 특수한 관계를 이룬다. 유행에 의해 과거의 패션은 다시 호출되며, 미래의 패션 또한 언제든지 선취된다. 그렇다면 전성태의 소설은 정확한 의미에서 유행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 시류성에서 벗어난 전성태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은, ‘지금과 비껴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유행일 수 있다는 역설을 이미 알았던 것이다. 전성태의 소설들은 아직도 아니고 이미 지난것도 아니기 때문에 항상 지금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전성태는 첫 번째 자화상을 거쳐, ?두 번의 자화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간을 멈춰 세우고, 시간에 균열을 내면서, 두 번 반복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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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자화상?이 보여주는 장면에는 치매가, 광주가, 그리고 성묘가 있다. 자전적 경험인 치매를 통해 전성태가 그리는 것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풍경이라고, ‘가 아닌,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치매는 80년의 광주를 만나면서, 국화를 들고 성묘를 떠나는 사람들을 조망한다. 이 풍경들이 자화상으로 제시되는 것은 우연일리 없다.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틈새에 서서, 견고한 현재에 균열을 가하며, 동시에 지금-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야겠다. ?두 번의 자화상?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치매에 걸린 이들과, 치매를 지켜보는 이들과, 그들을 애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우리는 이야기이외에 애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전성태는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시간을 분절하고 동시에 다시 이어 붙이는, ‘애도의 말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애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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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매라는 죽음 : “똑바로 기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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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가 시간의 틈에 균열을 내고, 정지된 그 순간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풍경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은 지워진 풍경이 될 것이다. 지워진 풍경?두 번의 자화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지만, 가장 격정적이라서 눈을 떼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80년 광주에서 눈을 감은 딸의 이야기와 치매에 걸린 아내의 이야기, 그리고 정신분열증을 겪는 아들의 모습이 중첩되어 배치되어 있다. 상황은 암담하다. 딸은 광주에서 군인의 총을 맞아 죽었으며, 딸아이의 비극을 뒤로 하고 아내는 치매로 먼저 세상을 떴다. 더군다나 아들은 누나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과 충격 때문에 누나의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는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성태가 강렬하게 제시하는 풍경80년의 광주이며, 그 풍경은 아내의 치매와 아들의 정신분열증에 의해 지워져있다. 여기서 ?두 번의 자화상?에 실린 소설들에서 치매가 가장 중심적인 문제 중 하나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 소설 소풍과 마지막 소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 동시에 치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실제로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고통 받았던 작가의 경험 등은 간과할 수 없다. 작가에게 어머니의 치매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훌륭한 작가는 언제나 경험을 넘어선다. 그리고 ?두 번의 자화상?에서 치매는 그 이상의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억을 소멸시킴으로써 물질적인 육체만 남겨놓는 치매의 그 독특한 죽음은 개인적인 고통 이상의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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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수없이 써왔을 것이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다 (...) 그 말의 진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 말처럼 뼈저리게 다가오는 말도 없었다. 기억이 없으면 그를 누구라 해야 할 것인가.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머니를 더 이상 어머니라 부를 수 있을까. 어머니를 바라보노라면 문득 존재에 대해 소름이 돋고는 했다.(이야기를 돌려드리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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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꿈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예시했던 서술자의 어릴 적 체험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서술자는 치매를 통해 기억해야 하는 존재인 인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으며, 기억이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느껴지는 공포감에 대해 말한다. 즉 치매는 보통의 질병처럼 단순히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존재론적 위기감을 불러온다. 어머니와 더 이상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그 사이,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그 지점에 치매라는 죽음이 놓여져 있다.

본래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만을 가리킬 뿐,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영혼으로, 기억으로, 그리고 이야기로 전해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가장 존엄한 인간성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죽음 이후에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영혼성은 부정되고, 인간은 장기와 세포들이 모여 있는 단순한 물질적 생명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영혼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체로 냉동될 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시체를 생산해냈던 아우슈비츠가 이러한 현대성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도시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격하, 숱한 비천한 죽음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시체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치매는 인간을 괴롭히는 전통적인 질병이면서, 동시에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은 육체는 진정한 죽음, 즉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질 인간성을 소거시킨다. 그렇다면 지워진 풍경에서 치매와 광주의 문제가 겹쳐서 나타나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최근 더욱 두드러지는 광주의 소환에 대해 서영채는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요인과 함께, “죽은 자들이 누려야 할 합당한 애도와 기억의 의례가 행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그 이유로 설명한다. 여기서 전성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광주에 치매라는 기억의 문제를 겹쳐 놓음으로써 광주의 풍경을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동시대적인 문제로 살려내고 있다.

다시 지워진 풍경으로 돌아가보자. 이 소설의 구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딸의 죽음, 즉 광주가 완벽한 망각(치매)과 집착적 환영(정신분열증)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치매가 자신마저 망실하게 되는 질병이며, 한편으로 아들의 정신병적 환영이 광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여기서 광주는 정극단의 망각 사이에 겹쳐져 놓여 있는 셈이다. 아무도 제대로 광주를 기억하거나, 대면하고 있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제 노인은 광주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똑바로 기억하라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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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 이놈아. 니는 도망치지 마. 똑바로 기억해야 해.”

노인은 아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네 누나는 죽은 거야. 돌아올 수 없어.”(지워진 풍경,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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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풍경’, 광주를 되살리기 위해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은 똑바로 기억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날 밤, 그리고 지금까지 두려움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또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망각하고, 결국은 자신마저도 잊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똑바로 기억할 수 있을까. 노인은 마치 시간의 틈에 균열을 내는 것처럼, ‘반복을 통해 망각의 시간 속에서 지워진 풍경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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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눈을 감았다. 격통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 “너도 도와라. 이번에는 너도 날 도와. , 누나를 내 등에 업혀라.” (...) “손에 피가 묻었어요.” / 아들이 우는 소리를 냈다. 노인의 무릎이 뜨뜻하게 젖어왔다. 아들이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 “가자. 똑똑히 봐둬라.” / 노인은 업은 시늉을 하고 현관을 나섰다. 아들도 따라나왔다.(지워진 풍경,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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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망상에 빠진 아들과 함께 딸이 죽었던 그날을 다시 재현한다. 영상을 멈춰 세우는 버퍼링처럼, 아들과 함께 딸아이가 죽는 날을 실제로, 그리고 상상 속에서 정확히 두 번반복하는 노인의 그로테스크한 행위는, 반복을 통해 시간을 멈추고 광주의 공포스럽고도 기괴한 풍경을 전면화시킨다. 결국 이 두 번의 반복을 통해 아들은 노인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기억하기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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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도라는 형식 : 인간은 국가보다 본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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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풍경은 이 시대 광주가 망각과 환영 사이에 위치한다고,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광주를 다루는 기존의 소설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전성태의 소설에서 치매와 함께 제시되는 풍경들은 광주에 그치지 않는다. 실향민, 적군묘지, 탈북자에서 외국인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 풍경들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망각되고 있는 것들이다. 광주를 다루는 전성태의 태도가 돋보인다면, 그것은 광주를 전라도 광주가 아니라, ‘망월동이 아니라, 일상의 차원으로 귀환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성태가 광주와 더불어 이러한 풍경들을 삶 한가운데로 소환하는 방식은 바로 성묘, 애도하기를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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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그녀는 대학생이었다. 그해의 살육은 그녀한테 아무 피해도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교정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상중(喪中)인 것처럼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졸업과 함께 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그녀는 잠시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우울했다. 그의 무덤은 자신이 악몽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시켰다.(국화를 안고,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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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를 안고는 광주에 대한 기억 때문에 우울함을 안고 살아가는 한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광주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고도 여전히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광주에서 죽었다는 한 청년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녀의 삶은 달라진다. 낯선 도시에서 광주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오가면서 남자의 무덤을 볼 때마다 자꾸 눈이 갔다. 불편한 마음이 맺혀서 풀리지 않았다(235).” ‘맺혀서 풀리지 않는불편한 마음, 그리고 그것에서 초래되는 우울증은 치유되지 못한 기억이 그 원인일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자유,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일반적인 과정은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방해받거나 억압되면 세상에 대한 무의미, 자기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음 등의 우울증이 초래된다.

80년 광주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회피되고, 망각되어 왔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청년의 무덤 주위를 서성거린다. “그의 무덤은 여자에게 어떤 추모탑과도 같은 존재”(236)였으며, 그녀에게는 애도의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의 아버지는 영혼결혼을 통해 그 애도를 막는다. 청년의 아버지는 실연으로 자살한 여자와 청년을 영혼결혼 시킴으로써 광주의 문제를 실연 따위의 개인적인 비극과 같은 층위에 위치시키고, 광주의 죽음을 망각하려 한다. 청년의 아버지는 스스로 죽음의 한가운데서 살아왔다”(230)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은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배제된, 죽음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는 삶에 불과하다. 그는 청년의 죽음 또한 이렇게 격하시킨다.

다른 도시로 전근가기 전, 그녀는 국화를 안고마지막으로 청년의 무덤 근처를 서성대지만 결국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녀가 끝끝내 청년의 무덤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무덤은 추모탑으로 생각되었지만, 그녀의 추모는 무덤으로 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더욱 중요한 사실은 처음부터 청년의 무덤이 망월동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애도는 애초에 광주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망월동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애도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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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하월 옆에 가만히 누웠다. 하월이 뒤척이더니 앓듯이 흐느꼈다. / “스님!” / 여자는 하월을 꼭 껴안았다. 하월은 가만히 품속에서 흐느꼈다. 여자도 맥없이 울음이 터졌다. (...) 아직 새벽이 오려면 먼 것 같았다. 얼핏 코 끝에 국화향이 풍겨왔다. (...) 이불의 온기와 익은 촉감이 생생했다.(국화를 안고,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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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루 종일 국화를 안고다녔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정작 국화향이 풍겨온 것은 청년의 무덤이 아니라 그녀의 집, 그리고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젊은 비구니 하월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이 지점에서 전성태가 광주를 애도하는 방식이 지닌 독특성, 그리고 탁월성이 드러난다. 그는 광주의 기억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애도하는 성묘는 광주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의 시대가 산 것도 없고 죽은 것도 없는 시절”(252)이라면, 광주는 단지 일회적이거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에서 두 번, 그리하여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두 번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이제 광주는 망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향민들의 풍경에도 있고, 탈북자들의 아파트에도 있으며, 누군가 남몰래 국화를 바치는 적군묘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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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 적군의 묘지에 제물을 올리는 아주 생경하고 특이한 경험들에 대해 그는 생각했다. 군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왠지 감당이 안되지만, 그러나 은밀하게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이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인간적인가? 그래서 나는 사람인가?(성묘,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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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는 그 제목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성묘, 즉 애도하기에 관해 말한다. 전방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는 퇴역군인 박 노인은 자신의 밭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중공군과 북한군의 묘지, 적군묘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남몰래 적군묘지를 관리하고, 때에 맞춰 성묘를 지낸다. 물론 그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적군묘지를 조성했다지만 엄연히 적군인데 군인들에게 고개 조아려 추모하라고 할 수는 없”(179)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일은 국가가 아니라, 노인이 대신 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는 한 번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성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고, 더군다나 진정한 성묘, 애도를 허락한 적도 없다. 국가원수를 영접하기 위해 벌어지는 시골마을의 소동을 그린 영접에서는, 번번히 커피 나르기 연습에 실패하는 공무원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다룬다. 커피배달의 진수를 보여주는 다방 레지는 손님을 사람으로, 심지어 짐승으로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수한다. 그리하여 국가원수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 미션은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인간에서 인간성을 소거해야 한다는 이 가르침은 이게 인간적인가라고 반문하는 박 노인의 질문과 대비된다.

이는 탈북자의 문제를 다룬 로동신문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탈북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발견된 로동신문은 경비원 나 씨에게 큰 공포심을 준다. 그는 로동신문을 발견하고 난 후 입주민이고 뭐시고 거시기들이 모두 빠뚜름히 보”(167)이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태극기로 헌 옷을 싸서 버리려는 탈북자를 발견한 후 나 씨는 혀를 찰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상 나 씨 자신의 영정사진을 보관하기 위해 책상서랍을 열었을 때, 그가 발견하는 것은 태극기와 로동신문이 나란히 접혀 있”(170)는 모습이다. 그리고 로동신문으로 자신의 영정사진을 포장하다가 깨닫게 되는 것은 애초부터 로동신문이 사진틀을 보관하기 위해 쓰였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 소설에서 태극기나 로동신문은 영정사진을 보관하기 위한 포장지일 따름이며, 인간적인 죽음과 그 추모를 위한 영정사진 앞에서, 태극기나 각종 선동 문구가 가득 적혀 있는 로동신문은 아무것도 아니다. 본래부터 인간은 태극기보다, 국가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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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성묘가 애도라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나 탈북자 따위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어 존재하는 인간성의 보편적 표지라면, 망향의 집에서 납북되었다가 간첩으로 몰렸음에도 자신의 고향집에 몰래 성묘를 다녀온 사실을 평생 비밀로 간직한 기로성 노인의 선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실향민들은 알고 있다. 노인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음에도 그것은 오히려 참 복많은일이었고, 그 이유가 성묘까지 하고 왔단”(223) 것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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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설이라는 기억 : 이야기는 언제나 두 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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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는 한계상황에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게 만든다. 한계상황은 삶의 모순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우리에게 체득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애도는 망월동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산 것도 죽은 것도 없는이 시대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성묘를 통한 애도의 형식은 우리 삶의 우울증을 치료하고, 인간이 당면한 물질적 죽음을 극복하며, 희미해져버린 인간의 본질적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 행위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기억은 애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제 애도의 형식을 소설의 몫으로 옮겨보자. 소설은 어떻게 애도할 수 있는가. 이 긴 이야기의 도달점 또한 바로 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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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의 첫 작품인 소풍과 마지막 작품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가 모두 치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은 앞에서 밝힌 바다. 그리고 이는 치매의 시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배치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기실 소풍이야기를 돌려드리다를 경유함으로써 완성되는 소설이다. 이 두 소설은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의 처음과 끝에 놓임으로써 소설집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그러한 구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소풍에서 알콜중독 증세를 보이는 남편 세호는 치매 증상이 의심되는 장모와 함께 가족 소풍을 떠난다. 소설적 완숙함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족의 소풍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또한 흥미로운데, 그 불안감은 장모가 과연 치매에 걸렸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결국 네잎클로버 찾기와 보물찾기의 실패를 통해 장모의 치매가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 불안감은 절정에 달한다. 아내는 오열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장모는 숲에 버려진 아이처럼 혼이 빠졌다. 결국 이 소설은 불안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던가.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세호가 던지는 한마디는 아름답다. “괜찮아요, 장모님. 아무 문제 없어요.”(36) 소설의 마지막, 이 문장에 다다르면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장모의 치매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한 문장을 위해 달려온 것임을. 그 불안함은 모두 이 아름다운 문장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하지만,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정말 괜찮은가? 치매라는 공포 앞에서 허망한 위안에 그치고 말 뿐 아닌가. 잠시만 대답을 미루고 마지막 소설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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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돌려드리다어머니를 위해 쓰여진 소설인데, 작가는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어릴 적 겪은 허황한이야기를 들려준다. 열 살 무렵, ‘는 보리밭에서 혼불을 보고 난 후, 사람들의 죽음을 예견하기 시작했다는 것. 기이하게도 꿈을 꾸고 난 후 실제로 주변 사람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 해 마을의 다섯 명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었다. 작가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왜 갑자기 이런 허황한 이야기를 하는가. 여기에 바로 ?두 번의 자화상?의 핵심이 들어 있다. 반드시 반복되는 두 번의 이야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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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 무렵은 이야기 속에서 사는 것 같았다. (...) 어머니의 얘기가 효과를 본 걸까. 나는 더 꿈에 시달리지 않았다. (...) 그해를 물리고 나자 나는 어떤 신열에서 놓여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마가 뜨겁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이이기를 들려드리다, 3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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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야기는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다. ‘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릴 적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서술자는 이제 요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주느라고 일찍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애써 떠올려야’(324)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치매라는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야기를 되돌려줌으로써 가능해 진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의 입을 통해 두 번 반복되리라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그 죽음의 육체성 앞에서 서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돌려드리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는 두 번 반복된다. 어머니에게서 한 번, ‘에게서 한 번. 두 번의 반복을 통해 이야기는 시간에 틈을 만들어 내고, 기어이 시간을 넘어선다. 이제 두 번 반복되는 이야기는 기억하기이며, 동시에 성묘이고, 애도이다. 애도는 국화향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 실현된다. 인간이라는 인간성은 이야기를 통해 완수되는 것이므로,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틈에 서술자는 두 번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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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팔며 어렵게 살아가는 여자와, 그 딸의 이야기를 다룬 낚시하는 소녀역시 마찬가지다. 새 소리를 녹음하여 듣는 것이 취미인 그 소녀는, 어머니의 병세로 인해 먼 곳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새에게 다시 이야기를 남긴다. 지금껏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를 즐겁게 해줘서 고마운 새들에게 다시금 이야기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녀는 어머니에게도, 설사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돌려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고, 죽음 너머에도 여전히 그녀를 불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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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풍에서 세호가 장모에게 괜찮아요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그럼에도 세호는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또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두 번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세호는 이야기를 통해 장모를 죽음에서 구하고, 기억이라는 형식으로 건져낼 것이다. 작가가 지금 어머니를 앞에 두고 그렇게 반복하고 있듯이. 이것이 소풍이 이 소설집에 실린 첫 소설이자, 사실은 가장 나중에 쓰여진 소설인 이유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 영원히 반복되는 이야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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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배웅, 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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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엉뚱하게도 배웅에 대해 말해 본다.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쏘야의 귀국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나가는 미숙의 이야기 말이다. 이 소설은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다루는 평범한 소설로 읽히지 않는다. 이 소설의 핵심은 쏘야가 귀국하기까지 공항에서 벌어지는 일들, 바로 짐 맡기기이다. 이 소설에서는 짐을 맡기고, 짐을 푸는 과정들이 이상하리만큼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불필요한 짐을 버리려 하는 미숙에게 쏘야는 말한다. “다 버리면 나 한국생활 아무것도 없어.”(55) ,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남게 되는 잔여물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쏘야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 버린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은, 그녀가 억지로 맡긴 짐들이다. 처치하기 어려운 커다란 자동차 범퍼를 아무 버스에나 버리고도, 미선에게는 비닐봉지에 들린 빨간 닭발이 또한 남아 있다. 범퍼를 무사히 버리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곤란한 그 무엇, 그 두 번의 마음, 닭발 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될 두 번의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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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싼 대숲은 어린 내게 항상 두려운 공간이었다. 도망자가 된 어른들이 대숲으로 숨었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을 뿐 아니라, 깨진 옹기나 사금파리를 유기하는 곳도 대숲이었다. 왠지 썩지 않을 것들을 유기하는 무덤처럼 여겨졌다. 결정적으로 마을 연못에서 진혼굿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로는 대숲의 이미지가 한층 더 음습해졌다.(이야기를 돌려드리다, 315)

여전히 대숲은 무서웠지만 대꽃 얘기를 듣고 난 뒤로 대숲이 다른 차원으로 보였다. 산갈치의 세계처럼 신비로워 새로운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흰 대꽃이 마을에 만발하고 봉황이 날아드는 상상을 했다.(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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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의 온갖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대숲.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앞에 두고 그 대숲을 떠올리는 작가에 대해 생각한다. 대숲에 숨겨져 있는 도망친 사람들의 이야기와, 썩지 않으며 세월을 견디고 있는 것들과, 그리고 그 울창한 무덤과, 그 무덤에서 펼쳐지는 진혼굿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에 결국 ?두 번의 풍경?이 수렴되는 곳은 대숲이다. 이야기와 무덤이 있고, 진혼굿이 펼쳐지는 대숲은 무한히 반복되면서, 시간에 균열을 내고, 시대가 망각해버린 것들을 끊임없이 되살려낼 것이다. 전성태의 소설들이, 그리고 소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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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2015년 제16회 이효석문학상 심사평 :

수상작가의 작품은 전성태 소설집창비출간이었기에 작품론이 실리지 않아

재단 블러그에 포스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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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평론가

                                                                                   

출생  1979년생.  

학력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2017년)             

수상   2013문학사상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등단

                                                                                                             이효석문학상 (15, 16, 17) 수상작품론      

                                                                            2016定本 이효석전집6권 편집위원

                                                                                                              ezhoon@hanmail.net